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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2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2. 2008.11.13 자신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Part II
2008.12.02 23:03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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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대학교수한지 약 16년 된것 같다. 가는곳마다 한국 유학생이 있어서 그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매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되풀이 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한국유학생들의 표절문제 이다. 내가 가르쳤던 모든 학교에서 해마나 예외없이 발생하는 사건이다. 한국학생이 늘어난 탓에 그 문제의 빈도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먼저있던 대학에서 한국학생들의 표절문제는 제법 많은 교수들에게 두통거리였다.

사연을 들어 보면 다양하다. 믿기어려운 흔한 이유중 하나는 "몰라서 그랬어요"이다. 학교 학칙에 그리고 매 수업의 실라버스에 표절을 금하는 사항이 분명히 적혀 있어도 "정말 몰라서 그랬어요"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물론 많은 한국학생들을 지도하고 상담하며 발견하는 문제중 하나가 실라버스를 잘 읽지 않는 경솔함이다 (이문제는 나중에 따로 브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그래도 "잘 모르고 그랬다"는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나늘 위시하여 다른 여러 교수들은 이 문제를 수업첫날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절문제의 시비는 한국에서도 이제는 제법 사회화된 이슈이기 때문이다.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시간을 불성실하게 사용한 경우이다. 갑자기 마감날을 맞추어 글을 쓰자고 하니 무리를 하게 된다. 더우기 편안한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로 써야하는 글이니 표절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책 저책, 혹은 이논문 저 논문에서 조금씩 배끼어 짜집기 한것을 과연 교수가 알겠느냐는 심사로 교묘히 글을 써 나간다.

그러나 학생들의 글을 읽는 교수는 별로 어려움 없이 문제를 잡아낸다. 교수마다 요령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writing style 의 급격한 변화 및 상이한 writing style의 혼합이다. 영어로 글을 많이 쓰고 읽고 또 책을 편집까지 하도록 훈련받은 나의 경우 writing style의 변화 및 논리의 급격한 전환은 마치 빨간색 글자가 갑자기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것 같다. 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빨간색이 주황색으로 바뀌는 듯한 문제의 변화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다보면 의심이 더 확고해지게 된다.

표절행위에 그나마 조금 동정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은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아닌지 그 선을 분명히 이해못해 생기는 경우이다.

이유가 어찌 하였던 표절은 교수에 대해서 보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범죄하는 행위이다. 십계명중 7계명 "도적질 하지 말아라"를 구체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모르고 훔쳐서는 안된다. 모르고 조금만 훔쳐도 안된다. 훔치려는 의도를 가져도 안된다. 믿는자는 남의 글을 빌려올때 어디서 빌려 왔는지 정확히 명시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이고, 믿는자의 능력이다.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믿는자는 교수가 주는 학점에 연연해 해서는 안된다. 믿는자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학점을 더 추구해야만 한다.

이제 학기말이 다가 온다. 텀 페이퍼의 마감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글을 교수에게 제출하기전에 자신을 들여다 보라. 교수가 발견하기전,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 (www.turnitin.com)이 발견하기 이전 스스로 발견하여 회개하고 밤새워서라도 표절의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다음의 웹사이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래에는 표절로 문제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격은 사랑하는 어느 형제의 글이다. 이것을 회개하며 아파하던중 주의 은혜로 만나서 형제를 도울 수 있었다. 긴 간증이라 앞과 뒷 부분을 생략했다. 형제로 부터 다른이들과 이 내용을 나누어도 된다는 허락하에 이곳에 소개하는것이다. 모쪽록 학기말을 은혜가운데 잘 매듭짖기 바란다.

… 중략… 아직 한번도 외국 학생에게는 강의 과목을 맡기지 않았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다른 박사 과정 학생 두명과 같이 시간을 나누어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연구 또한 너무 잘 되었고 한번에 두개의 연구를 학회에 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것들이 너무 잘 이루어지고 하니까 제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진정으로는 내가 잘 나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거야 라고 생각을 한적도 있는것 같습니다. . . . 주위에서는 벌써 박사님 이라고 부르고 다들 부러워하고 하니 빨리 졸업해서 미국에서 교수해야지 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 . .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거만해지고 뽐내며 자랑하는 저였습니다. 그러던중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중지 시키셨습니다. 강의하랴, 연구하랴, 수업 따라 가랴 모든것이 제 욕심으로 채워졌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학기말 수업과제물을 내야 하는데 아이디어도 안떠오르고 해서 교수님들이 하셨던 연구를 그만 베껴서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표절로 징계위원회가 소집이 되었습니다.  교수님들께 용서를 구하는 편지도 써보았고 또 학교에 계시는 한국 교수님이 저희과 교수님 한분 한분 다 만나시며 한번 용서를 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이일이 있기전에는 개인적으로 그 한국 교수님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좋았었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분의 통계수업을 꼭 두과목 이상 들어야 했는데 한국 학생과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엄격하시고 점수도 잘 안주시는것 같아 사실 싫어했습니다. 또한 저의 박사 논문 커미니 멤버로 들어오실수도 있어서 저는 아예 다른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제가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 알고 계셨다면서 최선을 다해 이번일이 잘 풀릴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의 모습과는 다르시게 너무 온화하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된 이후로 매일같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의 교만함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신 좋은 기회와 시간들을 헛되이 썼습니다. 주님 저 이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싶습니다. 주님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신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중에 그 미워했던 한국교수님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일을 통하여 그분과의 관계회복을 원하시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마음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에게 너무 잘해주면 공부도 안하고 너무 교수만을 의지할것 같고 또 박사과정 학생이니까 그만큼의 기대치가 있으셨는데 제가 그만큼 못한것을 그분탓으로 돌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일을 통하여 제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저의 교만함과 관계회복 이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기도하면서 “왜 이런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 분야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아주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한순간에 공부를 그만하게 되었다니..지금까지 학부, 석사, 박사 과정까지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왜 이런일이..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났나요???  하지만 이일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시련은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주님으로 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사탄으로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자기의 욕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다고 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되고 결정이 나기를 1년 정학을 주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하지만 1년후 다시 입학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그곳에서 계속 공부하는것이 안좋을수도 있을것 같고 성적표에 계속 꼬리표가 따라다닐거라는 생각에 학교를 옮기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학교를 나와 다른학교로 편입준비를 하게되었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벌써 제가 다녔던 학교에 전화를 걸어 왜 이학생이 편입을 하려는지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를 나오게되면서 그곳에 있는 교수님들께서는 이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약속하셨지만 한분의 교수님이 학회에서 친한 한국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옮기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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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21:21

자신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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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겸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아야 자신감 추구 보다 겸손을 더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겸손에대해서는 이미 앤드류 머레이가 쓴 "겸손"이라는 소책자도 있어 사실상 그 책을 읽는것이 매우 도움이 될것이다. 따라서 이 브로그에서는 그곳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거나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소책자를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겸손은 먼저 자기중심적 태도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정직한 태도이다. 과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할 자세가 될 수 있다. 겸손한자는 공부할때 내가 어떤 주제를 남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에 겸손한자는 "그 주제의 실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다던가, 토론에 참여해 보면 겸손한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쉽게 구별된다. 겸손한자는 다루고 있는 어떤 주제를 자기가 발견하고 생각한 만큼 솔직히 다루려 한다. 더 적게 아는것 같은 비굴함을 취하지 않는다. 또 그랬다고 남보다 너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으로 부터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오게 되면 방어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반가워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깊숙히 생각하려 한다. 아는만큼, 또 생각이 미치는 만큼만 대답한다. 그리고 청중의 생각을 물어 본다.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오만한자 (자신 만만한자)는 방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땅한 대답이 없으면 당황해 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얼버무리다가 더 많은 질문을 받고는 오히려 자신의 짦은 생각이 들통나버리기도 한다.

강의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좋은 질문하게 될때, 그러나 그 마땅한 대답이 없는 겸손한 교수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함께 토론하려 한다. 그러나 오만한 교수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런적이 제법 있었다).

겸손한 학생/학자는 사실에, 현상에, 주제의 이해/파악에 더욱 큰 관심을 둔다. 그리고 다른이들과 함께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를 갖는다. 그들은 오히려 정직하다. 학생으로서, 학자로서의 바른태도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논문발표나 토론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접근하려는 그의 태도를 주위 동료들은 오히려 존중해주며 더 신뢰해준다. 겸손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것 이외에 진정한 겸손은 누구의 시선을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즉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한 새벽이슬같은 주의 군사들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모든일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동기를 취하지 않고 매사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살아간다. 그는 사람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날카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 가며, 그같은 시선으로 인해 안정감을 갖는다. 왜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은 그 눈을 내게서 다른데로 돌리시지 않을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은 겸손한 삶이라고 말하고 이렇게 살아가는자를 겸손한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다.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끊임 없이 바뀌는 기대와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혼돈이라는 가마솥에 빠져 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런 생각과 감정, 상황에 따라 바뀌는 그같은 변화무쌍한 눈을 어찌 기쁘게 해줄 수 있단말인가? 소위 자신감 있는 자들은 이같은 상황속에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수 있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또 이같은 변화무쌍을 제법 담대하게 대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들을 놓고 우리는 자신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신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정말 자신은 믿을만한 대상인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을때가 너무 많다. 내 작심 삼일을 연약한 속성을 어떻게 믿는가? 상황이 불리하면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는 이 마음을 가진 나를 어덯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물체가 내게 큰 충격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것 같은 내 연약한 몸을 신뢰하기 어렵다. 철인이었던 뉴욕 젯트 미식축구 선수였던 데니스 버드가 경기중 다른팀원과 강하게 부딛혀 그의 몸이 공중에 날았고, 땅에 몸이 잘못 닿아서 사지를 사용못하는 척수장애자가 되었다. 수백 파운드의 무게를 들던 그가 몇그램의 무게를 들 수 도 없는 사람으로 변했을때 그는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선언해 버렸던것을 알고 있는가?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믿으면 믿을 수록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믿으면 믿을 수록 더욱 믿음이 자라는 것이 하나님이다. 사람은 (부모일지라도) 실망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이같은 믿음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해본이들은 벼랑끝에 서있을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갖게 된다. 이같은 믿음을 가진이는 99번의 실패를 해도 절망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것을 믿는 믿음으로 또 시도할 용기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감으로 살 수 없다. 또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된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믿음이 내게 힘을 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담력이 생기는 것이다. 골리앗 앞에선 어린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 45) 라고 외친것은 철이없어 입으로 내 뱉은 객기가 결코 아니다. 또 12명중 절대 다수였던 10명의 가나안땅 정탐꾼들이 모세에게 보고 하기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민 13: 33)라고 말할때 갈렙은 무엇이라 하였나? 그는 옷을 찟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 9). 갈렙이 자신을 신뢰하였던가? 그의 고백속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땅을 정복해야할 사명을 가진 우리들은 그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겸손한 자세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형제님, 자신감 가지려 애쓰지 마시고, 겸손하려 애써 보세요!"라는 답은 형제의 기대에는 잠시 벗어 났는지는 모르지만 (안그랬을것이라 추측한다), 하나님의 기대에는 벗어난것 같지 않다.

*사진은 Google Image Search (http://images.google.com/)에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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