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9.12.02 인생의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고 따르는가?
  2. 2009.11.10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3. 2009.08.01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4. 2009.01.20 영어로 고생하는 흩어진 나그네들이여
  5. 2009.01.12 시간을 보는 시각
  6. 2009.01.08 큰 기쁨
  7. 2008.12.11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으면 결혼할만 하다
  8. 2008.12.08 왜 데이트 하는가?
  9. 2008.12.02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10. 2008.11.16 교수님, 귀국해서 신앙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2009.12.02 15:05

인생의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고 따르는가?

학기말이라 분주하다. 한학기 내내 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한 텀 페이퍼를 채점하여 학생들에게 돌려 주는 과정에서 몇 학생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들은 대화중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여학생들은 잘 운다), 몹시 흥분하며 화를 내기도 하였다 (남학생의 경우 잘 흥분하지만, 이 부분은 남.녀가 비슷하다). 한결같이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고 비판도 하였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지만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 하나를 전에와 마찬가지로 금년에도 발견 하였다. 즉 실라버스 (Syllabus; 강의안) 를 대충 읽음으로 오는 문제인 것이다. 

학생들이 텀 페이퍼를 작성할때 범하는 몇가지 실수중 하나는 실라버스를 주의깊게 읽지 않는 것이다. 보통 실라버스 에는 교수의 강의 계획서와 기대 및 텀 페이퍼 작성 안내가 나온다. 교수가 실라버스를 작성할때는 보통 세부적인 계획을 학생들에게 제시 하며, 학생들이 그 계획을 잘 따라 주기를 기대한다. 교수가 실라버스를 작성할때는 그냥 하루아침에 기분에 따라 작성하는것이 아니고 전문분야의 특성과 세상환경의 변화에 따라 학생에게 가장 유익할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민한 후에 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성된 실라버스는 매해 마다 조금씩 바뀌어 간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거나, 지난해 도움이 되지 않았던것들, 또 학생들에게 혼돈을 주었던것들을 기억하며 보강해 나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가장 유익할 과제를 철저히 검토한뒤 실라버스에 학생들이 반드시 다루어야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따라서 실라버스는 어떤 점에서 학생들이 충분히 소화해야할 아주 귀중한 자료인것이다. 그리고 실라버스는 어떤점에서 교수와 학생이 맺는 계약서 같은 것이다. 어떤 교수는 실라버스 맨 뒷장에 학생들이 "본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었고, 주어진 계획에 동의함"이라는 내용을 적고 학생들이 서명을 하게 한다. 

실라버스를 대충 읽은 학생은 어떤 과제가 주어졌는지 그냥 대충 감을 잡을 뿐이다. 텀 페이퍼 쓸때로 대충 이해한대로 쓴다. 이해는 대충 하였지만, 많은 유학생들의 경우 A+를 받으려고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한학기 내내 고생하며 작성한다. 그리고 혁신적인 생각이 떠오를 경우 흥분까지 해가면서 글을 작성한다. 열심히 정성껏 글을 쓴 학생은 텀 페이퍼를 낼때에 A혹은 A+를 기대한다. 그런데 왠 일인가? A+대신 C, D, 혹은 Redo (다시 써라)라는 결과를 받는다. 경악을 금치 못하고, 흥분해 하며, 더러는 울기도 하며, 분노를 가지고 교수를 찾아 간다. 나는 잠도 많이 줄이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고, 수 많은 책을 참고로 하여 연구하고, 또 걸으면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텀 페이퍼만 생각하면서 고생하였는데 내게 돌아온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학생의 경우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혹시 미국인 교수가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하지 않나 의심하면서 분개해 한다.

교수의 반응은 간단하다. 나는 너에게 시카고로 가는 가장 좋은 운전길을 연구해 오라고 하였는데, 너는 뉴욕으로 가는 길을 적어왔다. 그러나 네가 적은 뉴욕가는 길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방법보다 탁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시카고가는 길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이같은 반응은 실제 교수가 그같은 내용의 과제를 주어서가 아니고, 교수가 쓰라고 한 방향을 무시하고 학생 스스로가 추측하고 생각한 방향으로 글을 썼을때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지난주 내 사무실을 다녀간 티나의 케이스가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티나는 나의 "여가 철학"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다. 그 수업에는 많은 과제가 있는데 제법 점수의 비중이 큰 과제중 하나는 크리스쳔의 관점을 가지고 여가 (Leisure)의 철학을 논술하라는 것이다. 그같은 관점을 돕기위해 그동안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세계관으로 여가를 바라 볼것과, 성경의 원칙과 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여가의 관계등에 대한 Guiding Questions도 실라버스는 분명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티나가 준비한 글은 여가의 철학이 아니였고, 치료레크리에이션의 철학이었다. 크리스쳔의 관점도 고려하지 않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다. 무엇이 티나로 하여금 본 과제의 특성과 빗나간 글을 쓰게 하였을까 이해 보려고 잠시 애써 보았다. 아마도 내가 치료레크리에이션을 주로 가르치는 교수라는 인상 때문이었을까? 본인의 전공이 그것이니 이번기회에 철학적 정의를 해보고픈 개인의 욕망때문이었을까? 어찌하였든 티나는 과제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빗나간 글을 쓴 것이었고, 이로 인해 본인이 기대하지도 않던 권총 (F)을 하나 찬 셈이 되었다. 

실라버스를 대충 읽은 다른 케이스가 있다. 어제 사무실을 다녀간 캔디스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의 경우가 아주 적절한 실례가 될 수 있다. 캔디스는 페이퍼의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교수가 실라버스에 요청한 내용을 철저히 다루지 않았다. 캔디스가 듣고 있는 과목은 치료레크리에이션의 원리라는 과목으로서 요즘 미국의 Health Care System의 Issue에 대한 과제가 있다. 실라버스에는 그 과제에 대한 목적과 요구항목이 구체적으로 적혀있고, 이를 강의실에서 설명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Issue의 선택은 학생이 교수의 동의하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Issue에 대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Issue를 자세히 소개 하게 하였고, 선택된 Issue와 관련된 과거 역사적 사실들, 현제의 상황,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한 제언등을 다루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항목은 특정 점수를 부여하게 되어 있어서 그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 점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캔디스의 경우 Issue에대한 나의 동의는 받아내었지만 내가 연구하라고 실라버스에 요구한 구체적 항목들은 일부 다루지 않았다.  대신 내가 실라버스에 요청하지 않은 다른 항목들을 아주 장황하게 조사하여 보고 하였다. 요구한 항목중 잘 다루어진 부분은 실라버스에 적힌대로 점수를 받았지만, 다루지 못한 부분은 아무런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열심히 썻으나, 내가 실라버스에서 요청하지 않은 부분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게 연구하였어도 아무런 점수를 받지 못했다. 받은 점수를 모두 합해 보니 많은 부분에서 점수가 부족하여 결국 캔디스는 권총 (F)을 하나 받아야 했다.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당연한 것을 소홀히 함으로 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 무엇을 만들고 조립할때 그 물건을 만든 회사가 소비자를 위해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보고 그대로 따라 가면 쉽게 조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메뉴얼을 무시하고 나의 꾀와 직감을 가지고 그냥 조립하려고 할때 당하는 어려움이 좋은 예이다. 기본과 당연한것을 무시하지 않고, 조그만 것 일지라도 성실한 크리스쳔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완벽한 실라버스를 만들어 주셨다. 어떤 이들은 그 하나님의 실라버스 대로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무시하고 살아 간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는 따르지만, 다른 부분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실라버스 대로 (성경대로) 살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추측하고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좇는가? 인생의 실라버스를 충실하게 읽고 주님을 좇아야 할 것이다. 당연한것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 가다가 도착지 (finish line)에 섰을때 나의 달음박질이 헛된것이 되면 어찌할 것인가? 한번 심각히 우리의 삶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운동 경기를 하는 사람이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딤후 2:5; 표준새번역)
사진출처: http://leslievalesk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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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4:38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죄가 관영하는 이 세상에서 미끄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며, 거룩한 신앙인으로 책망할것 없는 삶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숨쉬기를 할때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어 밷을 수 있듯, 주의 말씀을 그렇게 자연스레 순종해 가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야무진 공상일까?

 위의 질문 뒤에는 나의 미끄러짐으로 인한 아픔이 숨어 있다. 내게 있어 미끄러 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크게 벗어났던 작게 벗어 났던지간에 내게 있어서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이 미끄러 넘어졌을땐 더욱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의 한심한 신앙생활로 인해 눈물을 그렁이며 아파하기도 한다. 더우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는 데서 미끄러졌을 경우 나는 더욱 좌절한다. “그렇게 살아 가면서 어떻게 캠퍼스 사역한다고 하고, 교회에서 설교 하고, 학생들 상담하지?” 라고 묻는것 같다. 아 내게 이같은 미끄러짐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미끄러짐에는 나의 부주의가 많다. 미끄러운곳을 걸어갈때는 긴장도 해야 하는데 그냥 방심하고 진행할때 미끄러진다. 내 발걸을음 잘 점검하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을 기도를 통해, 또 말씀을 통해 분별해 가면서 지혜롭게 가면 미끄러짐을 극소화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적 부주의는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한다. 늘 익숙해진 대학 캠퍼스가 내 생활의 주요 무대인 나에게는 영적인 긴장감을 갖기 보다는 늘 가던곳이고 하던 것이니 방심하게 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늘 만나고 얼굴을 대하는 편안한 가족이기에 말에서나 행동에서 실수할때가 있다. 아내에게 무례한다던가, 아이들의 말을 온전히 귀담아 들으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방심하고 있을때가 있다. 

일상생활의 부주의가 미끄러짐의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장애물은 나의 교만이다. 나의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함 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때 흔히 나타난다. 나의 경우 교만은 나 혼자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길이 더 안전해 보이고 더 지혜로와 보이는 것이다. 그같은 교만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향해 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이같은 생각이 내게 들어온 순간 나는 이미 미끄러진것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교만은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중요시 하게 된다. 일단 그같은 상황에 놓이면 세상것이 주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되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내가 나를 위해 만들고 싶은 그런 세계 및 상황을 바라게 된다. 이쯤되면 또한 내 왕국을 만들어 보려는 동기로 먹고 마시며, 뛰고, 쉬고, 일하게 된다. 나는 이같은 상황을 미끄러져 내동냉이쳐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빼먹지 말아야할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미끄러짐은 나의 회개의 문제와 아주 깊숙히 맞물려 있다. 입으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냥 자동적으로 용서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신앙생활 초기 특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적이 있었다. 이같은 회개는 변화를 동반하지 않기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게 된다. 그러나 때론 입술의 고백을 떠나 마음의 고백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아픈 마음으로 주께 용서를 부르짖는다. 입술의 고백보다 좀더 발전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이같은 방법은 도덕적 회개에만 머물 수 있어 또 다시 미끄러지게 한다. 참다운 회개는 가던길에서 거꾸로 되 돌아서야 된다는 결단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던길을 돌어서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며 그 눈을 뒤로 돌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응시한채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또 미끄러짐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유학생들과 삶을 나누며 대화하다보면 미끄러짐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자주 듣는다. 코스타나 교회의 수련회등 여러 집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제부터는 바른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헌신하려 하였지만 삶에 현장에 되돌아 왔을때 바로 미끄러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좌절해하며 힘을 잃는다.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진채 거기서 그냥 멈출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의 힘은 넘어 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부딛히고 깨지며 살아갈때 우리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삶이다.나의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분명히 아는 것 하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빠를 세워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넘어 지는 나를 믿기 보다 나를 늘 세워 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의 세 아이들은 나의 거룩한 삶 혹은 거룩을 향한 삶을 보고도 살지만, 나같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사용하시고 세워 가시고 만져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변화해 간다.

과연 영적 미끄러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많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죄성으로 미끄러지고 깨어지는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과 싸우는 대처방법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새벽이슬과 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는 반드시 나누고 싶다.

첫채로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유학생활의 목표가 학위취득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룩함 추구를 그 우선순위로 놓아야 한다. 이제 구원을 받았기에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에 신앙의 선한 경주를 멈추고 땅에 주저 않아 쉬고 있어서는 안된다. 공부하며 순간 순간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 즉 코람데오의 삶을 살도록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과 늘 동행한 에녹처럼, 오늘날 유학생들은 성경에 한줄밖에 나오지 않은 평범한 신앙선배인 에녹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소망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학업의 우수성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나의 죄성을 심각히 자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자 하는 죄성이 있음을 의식해야한다.  이것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지 않으면 죄의 속임에 쉽게 미끄러져 버린다. 그러나 그같은 죄성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냥 미끄러져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삶임을 순간순간, 삶의 모든 상황속에서 인정하는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발전 시킨다. 따라서 캠퍼스에서든, 캠퍼스 밖에서이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깊숙히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를 젖은 눈으로 바라볼때 우리는 나의 죄악들과 세상에 관영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해 치를 떨며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만 멈추지 말고,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와 화목을 원하셨던, 그리고 그 화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며 큰 사랑에 감격해야 한다. 미끄러져 넘어져 있을때 우리가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그 사랑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 소름끼치는 미움이 없이 일어 선다면 또 미끄러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두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매일 매일 말씀묵상을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미끄러짐 없는 똑 바른 걸음을 걷기 위해 우리는 순간 순간, 매일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글을 마치며 우리들처럼 미끄러짐의 아픔을 경험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 1-2)

사진출처: http://farm4.static.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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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21:25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누구를 만나면 흔히 받는 질문이 직업에 관한 것이다. 어떤일에 종사하냐는 질문에 나는 흔히 대학 교수라고 짦게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대학교수라는 대답과 함께 금방 되돌아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역시 주저치 않고 "치료 레크리에이션" 혹은 "레크리에이션 치료"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나의 대답은 적어도 이랬다. 그리고 그같은 대답은 나의 삶의 상태를 정확히 반영 하고 있었다. 나를 나로 정의 지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전문 분야와 그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라는것으로 나를 철저히 국한 시켰던 것이다. 내가 예배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하는 귀한 사명은 교회나 성경공부에서나 고백해야하는 그런 악세사리로 여긴것이다. 

누구든 이제 내게 전공을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나의 대답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은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예배 입니다!" 예배라는 새로운 전공이 내 삶에 따라 붙으면서 사실상 요즘 전공에 못지 않게 예배를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실천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전공 과목을 파헤치고 연구할때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예배에 대한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학문에 임하게 된다. 글을 쓸때도 그렇고 강의실에서 강의 할때, 학생들과 상담할때에도, 교수회의 에서도, 학술지 논문심사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께 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흠뿍 받는 일이다. 이같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고 가는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예배는 기쁨과 감동이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나의 죄와 이땅에 만연한 죄의 흔적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회개도 한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나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만큼 나를 더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해질 수록 내가 공부 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진다.

또 다른 나의 전공이 예배 인지라 나는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관련된 제반 활동영역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로서 대충 강의 준비를 하고 들어 갈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레크리에이션 치료에 관한 글을 쓸때 대충 끄적거려 낼 수 없고, 남의 생각을 이리 저리 조각지어 살짝 새롭게 하는 치졸한 글을 쓸 수도 없다. 학생들 상담 하고 만날때도, 전화 받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높아 지려고 강의 할 수도 없고, 내 이름 높이려고 글을 쓰려고 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인간 중심의 사로로 만들어진 지식체계안에서 죄의 흔적들을 들추어 내고 이를 하나님중심의 사고로 다시 비판하고 묵상하려 애쓰게 된다.

그래서인지 삶 자체가 너무 재미 있다. 교수생활에 신명이 난다는 말이다. 전문직의 삶이 예배임에 그곳에는 은혜가 넘친다. 은혜란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바, 공부를 하면서, 전공분야로 세상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찰과 지혜가 그때 그때 주어져 흥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것이 쉽지는 않다. 많은 싸움이 있다. 예배의 태도를 잃고, 예배의 대상이 세상 혹은 내가 될때도 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늘 동반하는 치열한 싸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삶의 전환을 매우 감사히 여긴다. 노파심에 한가지 더 설명해야할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예배라는 전공은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칭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예배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예배의 삶을 사는 우수한 예배자로 살고 싶고, 영원한 예배가 있을 천국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연습하며 더 누리며 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가 학문 분야 보다 앞선 주 전공이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 하시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의 전공의 분야를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도구로 쓰라고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것이 예배의 뒤에 물러 서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 둘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되야 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나이듯), 다시 말해 통합되어져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루어 내는 가장 근본이 바로 이원론의 삶 (삶과 예배, 전공과 예배)을 떠나, 신앙과 전공이 (또 신앙과 매일의 삶이) 일원화 되는 삶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학문과 삶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영위되어 지는것 이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공과 예배가, 삶과 예배가, 주일과 주중의 삶,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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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0 08:57

영어로 고생하는 흩어진 나그네들이여

오래전 이야기이다. 어느날 사랑하는 어떤 형제가 나의 사무실에 들렸다. 너무 반가웠다. 반가움과 동시에 또 놀라버렸다. 형제의 머리털이 보이지 않아서 였다. 머리털 다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물었다. 형제는 머리털 없는 머리를 극적거리며 "지난밤 삭발배 버렸어요!"하고 대답했다. 삭발을 해야할 어떤 큰 결심이 있냐고 물었다.

형제가 삭발은 한것은 영어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어가 자기때문에 고생하고, 자기도 영어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미국온지 6개월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유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대학원 수업은 토론위주인데 강의 들어갔다가 기침한번 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듣고 나와야 하는 아픔은 너무 크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미국유학 첫학기 수업에서 강의실이 다음부터는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교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같은 방에서 한시간정도 기다리다가 화가 나서 교수에게 달려간적이 있었다. 휴강을 하려면 칠판이나 강의실 문에 휴강사인을 붙이기라도 할것이지 남의 귀한 시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머리속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나온 말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른다) 뭐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화가나서 항의한적도 있었다. 교수가 웃으면서 결석을 하려면 미리 교수에게 통지하는것이 예의 인데 왜 무단결석을 하느냐라고 되물었다. 물론 나의 논리로 나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친절하게 앞으로의 강의가 다른 빌딩 103호에서 있을것이라고 하며 쪽지에 적어주며 나를 돌려 보냈다.

다시 삭발한 형제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형제는 영어를 잘할때 까지 삭발은 물론 앞으로 시리얼 (cereal)만 먹고 지낼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리얼 (cereal)만 먹다가 유학와서 객사할것 같아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얼른 자리에 앉아서 나와 이야기하며 진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밥하고 김치먹고 힘을 내라고 권유했다. 왜냐면 영어가 잘되려면 몇년이 걸려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유학생들, 특히 대학원생들은 강의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외에는 외로우니 한국학생들끼리 모여서 식사도 하고 테니스도 치면 놀기도 한다. 금요일 저녁에는 한인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가고, 일요일은 한인교회에서 우리말로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영어를 사용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강의실 벙어리에다가, 도서관에서 책빌릴때 2-3분 사서와 대화하는것, 식당에서 무엇을 주문할때 몇마디 하는것을 제외하면 영어를 향상시킬 기회가 전혀 없다. 

삭발한 형제뿐 아니라 이렇게 영어로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양로원이나 장애인들이 있는곳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곳에 가서 잘 하던지 못하던지 떠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져야 한다. 양로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죽을 입에 넣어 드리면서 한국이야기도 하고, 전공이야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외로운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도 감사히 서툰영어를 들어 준다. 짜증내지도 않는다. 워낙 외로운 분들이 많다보니 자신과 있어주는것 만도 감사해 한다. 

양로원에 있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다. 유학생때 만난 어떤 할아버지는 교육학과에서 연구방법론과 통계를 가르친 은퇴교수였다. 책도 몇권 썻다고 한다. 통계로 고생하던 나는 할아버지께 기본 개념을 배워 아주 잘 사용한적이 있다. 

나는 미국에 온지 2년 반만에 전공필수과목을 가르친적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열심히 강의도 준비했지만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았을때 도무지 잘 알아들은것 같지 않고 불쌍해서 강의를 들어주는것 같은 생각만 지배했었다. 그러나 다음학기에 또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고는 매우 기뻐한적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한탓이 더 컷을 게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나마 헤메면서 영어로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자원봉사경력이 큰 도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일주일에 10시간정도 장애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어떤날은 그들과 2박 3일 캠핑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들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가는 것이기에 교통편의, 음식, 침낭 등 모든것을 그곳에서 준비시켜 주었다. 나는 자원봉사를 통해 미국의 문화도 배웠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때 사귄 미국친구 (장애담당 디렉터)의 소개로 그 아이의 부모집에서 약 2년을 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줄때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영어도 배우고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삭발보다는 더 기가 막힌 영어 공부 방법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장애인들의 발과 손을 씻으며 사랑을 나누는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다. 사회에서 그 가족 조차도 찾지 않은 소외된 많은 이들이 있다. 집이 없는 Homeless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도 있고, 집없는 사람 집을 지어주는 Habitat of Humanity (http://www.habitat.org/)도 아주 좋은 기관이다.

엉어는 말을 배우기위함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함이다. 언어는 사랑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질때 바른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다. 칼빈대학의 동료인 바바라 카빌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Foreign language education prepares students for two related callings: to be a blessing as strangers in a foreign land, and to be hospitable to strangers in their own homeland."

사진출처: http://todaysseniorsnetwork.com/Hands,%20Caregiver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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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0:05

시간을 보는 시각

예로 부터 지금까지 시간이라는 주제는 많은이들로 부터 뜨거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과 관련된 주제로 출판된 수없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산업혁명이후부터 계속적으로 효율성, 생산성 및 속도에 대한 개념과 그 틀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은 한 인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고 성공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누구누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했다더라. 그런데 누구 누구는 9년이 지나도 마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3년내에 마친 박사는 능력이 있는자이며 성공한 자로 얼른 구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9년동안 학위가 마쳐지지 않은 학생은 무능한자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게을음으나 자포자기로 미루어지는 공부가 있기도 하다. 주변을 바라 보았을때 늦게 마친자가 빨리 마친자보다 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아가고 또 자신의 학문분야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개인을 떠나 집단의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개척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벌써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어느 어느 교회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교인수가 약 500여명 밖에 안된다. 2년에 1만명 가진 교회는 분명 성공한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닮아 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것이다. 반면 10년간 500명의 교인을 갖춘 교회는 얼핏 다른 교회가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칭찬 받고 책망 받는 교회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시록에서 칭찬 받은 교회는 그 크기와 빠른 성장 때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뭏든 시간에대한 관점은 어떤 잣대 (Yard Stick)을 가지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많이 살면 70-80년 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속도와 생산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서 숨쉬는 제한된 시간내에 더 많은것 보아야 하고, 해야하고, 경험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며, 또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자기몰입적인 달음질을 하는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허무를 위한 달음질"이 될 수 있다. "조금 더"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루었지만, 나 보다 조금 더 이룬 삶 앞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 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가 영원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의 속도와 생산량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생한 (born-again)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나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가, 방향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보다 더 중요 하다. 그리고 불필요한것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How much and how fast)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 (What)을 "어떻게" (How)  생산하는냐를 더 중요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한 확장보다, 천국의 확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천국확장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을 평가해줄 절대평가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안다. 현세에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찬사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의 평가에 더 관심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Formular를 제안해 본다: 

      1. 삶 = 생산량 (업적) ÷ 속도 (속도가 빠를 수록 삶의 숫자가 많고 그것이 삶을 결정한다)
      2. 삶 = 방향 x 믿음 (삶의 올바른 방향과 믿음의 충돌이 삶을 결정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공식은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두가지 공식을 놓고 생각해볼 일이다. 첫번째 공식으로 살때 나의 삶과, 가정, 이웃은 어떤 모습일까?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돈 벌어 더 많이 빨리 쓰고, 더 빨리 인생을 마칠것인가? 더 빨리 인생을 마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같은 삶이 사회에 기여하는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그리고 빠른 생산을 통해 더 빠른 그리고 많은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가?

가야할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자에게는 샬롬의 삶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을 망하리로다" (시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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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8 18:13

큰 기쁨

처음으로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했을 때에 내가 느꼈던 기쁨은 형언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쾌락을 맛보았다.
그러나 한 영혼을 구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
- 챨스 스터드
* Quoted from "ChurchLeader" by Christian Network


오래전 어느 주립대학의 교수로 있을때의 이야기이다. 한국식품을 사려고 하나밖에 없었던 한인마켓을 갔었다. 아내와 한참 장을 보고 있는데 어느 학생이 내 눈에 들어 왔다. 당시 한인 학생회 간부였고 비교적 한인 학생들에게 잘 알려진 학생이었다 (또 골프를 아주 잘쳤던것으로 기억난다).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기에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만 하는 급한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학생, 거기에 서 있는 모습이 해골이 서있는것 같구려!" 문뜩 느끼기에 성령의 인도하심 같았다. 그러나 순종하기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했다가 그 학생에게 깊이 상처 줄것 같았고, 또 그로 인해 내가 받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것 같아서였다. "어느 교수를 한인마켓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나한테 죽은 해골같다고 말하더라. 그런데 그 교수는 예수믿는 사람이더라..." 뭐 이렇게 나가면 교회에도 먹칠하는 일 같기도 해서 였다.

많이 망설였다. 절대 그 말을 할 수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성령께서 시키실때 불순종 할 수 없어 억지로 그 말을 전해야만 했다. 하기 싫었던 말이라 내어 뱉어야 했기에 감정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 뱉어 버렸다. 그 말을 들은 그 학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크게 실수 한것이야. 너무 심했어. 정말 분노가 하늘만치 치솟앗구나. 이제 나는 큰일 났다." 우선 상황을 모면 하려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려 했다. 만일 쥐 구멍이 어느곳에 있었고 또 내가 쥐같이 작았더라면 나는 당장 그리로 들어 갔을 거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절제하며 문가로 나가는데 그 학생이 상기된 표정으로 총알같이 내게 달려 왔다. 올것이 왔다 싶어 각오하고 그 학생을 쳐다 보았다.

학생: "교수님, 어디 사십니까?"
: (속으로) "그걸 왜 뭍냐? 그냥 여기서 해 버리지."
: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서 약 20분 떨어진 ***에 삽니다."
학생: "그럼, 장을 다보고 교수님 집에 가서 뵈어도 되겠습니까?"
: (우물쭈물) "뭐 꼭 와야만 되는 일이면 오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어색하게 헤어졌다. 물론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예수님 믿으려면 적당히 믿어야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라고 속으로 한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약 한시간뒤 그 학생은 우리집으로 그의 아내와 함께 나타 났다. 그 학생의 아내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자매였다.

학생: "교수님, 아까 왜 그런말 했습니까?"
: "누가 시켜서 그랬소!"
학생: "그게 누굽니까?"
: "성령님이요!"

그 학생은 정색을 하고 나를 쳐다 보았다 (째려 보는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학생: "교수님, 사실은 사촌형님이 몇해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형이 돌아가시기전 누군가가 교수님이 제게 했던 말을 형한테 똑같이 하면서 교회 나와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놓고 같이 웃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형님은 교회를 가지 않았고, 그뒤에 교통사고 난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요."
: "그래요? 교회 다녀도 교통사고는 나는데..."
학생: "교수님, 교회가야 될것 같습니다."
: "교회만가지 말고 예수님 영접하여 구원 받으십시오."

그날 그 학생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날 우리는 너무 기뻐 함께 울었다. 위의 Studd가 고백했던것 처럼 그때의 기쁨은 다른 세상적 기쁨과 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마치 잃은양 한 마리를 찾아서 어깨에 메고 오는 목자처럼...


                      그림출처: http://www.hansgruener.de/pictures/krippen/strassenkrippe_verloren_hirte_48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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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1 02:40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으면 결혼할만 하다

캠퍼스나 코스타에서 청년들과 대화 나누다 보면 흔히 부딛히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교수님, 어떤 사람하고 결혼해야 되요?" 청년들중 일부는 더욱 구체적일때가 있다. "지금 사귀는 자매 (혹은 형제)가 몇명 되는데 그중 누가 적합할까요?" "교수님, 막연하지만 결혼 대상자를 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어느날 내 앞에 형제 (혹은 자매)가 나타나면 어떻게 분별하지요?" 청년들에게 있어 배우자 선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을 제법 심각히 고민해 보기도 하였다. 물론 몇명을 한꺼번에 사귀며 그중 하나를 찍으려는 심사를 가진 청년들과의 대화는 좀 더 길어 진다. 왜냐하면 다루어야할 문제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올렸던 글 가운데 데이트의 목적이 결혼을 전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데이트는 하나됨의 연습이라 하였다. 오늘 결혼 대상자에 대한 몇가지 제안을 해 보려고 한다. 물론 내가 결혼 전문가가 아니기에 신앙을 가진 인생선배로서 개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고와 미국의 잘 알려진 청년사역자들 (Budziszewski교수, Spencer교수, Opitz교수, Melleby교수)의 나눔을 참고 하였다.

첫째, 헌신된 크리스챤과 결혼하라. 매우 독선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을 누가 전도하느냐고 금방 반격 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믿지 않지만 전도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다. 굳이 불신자를 포기할 수 없다면 최소한 세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겠다.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때 까지 기다리던가, 그때가 안오면 결혼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그냥 결혼하여 믿음을 잃을 확율을 높일뿐 아니라 심한, 아주 치열한 영적전쟁으로 들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결혼은 신앙인들끼리의 만남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돕는 베필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것이다. 성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첫번재 조건이 빗나가면 아래 두가지 다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도 첫번재 조건이 중요한 이유이다.

둘째본인을 진리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자 라야 한다 (본인 또한 상대를 그렇게). 진리라 함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두사람이 해야할 일, 해서는 안될 일들, 닮아야할 또 닮지 말아야할 인격적인 문제에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진리안에서 사랑이 이루어 져야한다. 이같이 진리안에 거하는 사랑은 관계속에서 악인들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시편 1: 1)에 들어 가지 않도록 서로 견제해 주며 성품이 아름답게 자라가게 되고, 관계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세워간다.

주님께 헌신된 아내와 데이트 하던 과거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신앙이 희미했던 그당시, 아내의 이상한 발언으로 인해 나는 마음이 몹시 상한적이 있었다. 그 자매왈: “나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두번째 사랑해요!”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서 너 그러면 하나님과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내 뱉고는 여러날을 만나지 않은적 있다. 사랑에서 두번째 서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 자매의 그같은 버릇은 아직 남아 있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거나, 오만한 생각 혹은 행위를 할때 칼 맞더라도 성경말씀 인용하며 권면해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내가 옆길로 빠질때 나 또한 점잔만 빼지 않는다. 진리안에서의 사랑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관계로서 발전한다 (시편 1: 3). 그 결과는 풍성한 열매와 주안에서의 형통이다.

세번째, 좋은 엄마.아빠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어야 한다. 데이트할때 이런 것이 일찍 분별 되어 결혼에 까지 이르면 아름답다. 아이들이 장성한후 나처럼 나중에 주안에서 자라나 좋은 아빠가 되려 하면 참으로 힘들다. 내가 전에 올린
자녀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 책이란 제목의 글을 읽에 바람직 하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나의 아픔이 적혀 있다. 사귀는 자매가 진리안에서 좋은 엄마, 또 형제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눈여겨 보아야 한다.

돈많고 좋은 직장 좋은 배경의 남자.여자가 그 조건에 들어 있다면 앞으로 피바다를 지나는 살벌한 부부관계를 생각하며 결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아내를 만날때 그냥 두가지만 보았다. 첫째로 그가 자매였고 (형제하고는 결혼이 안되니까), 둘째로 내 눈에 보암직 스러웠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교회에서 집사도 하고, 또 성경공부도 인도하며,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제법 헌신된 형제인것 같아 보여서 속아서 결혼했다. 초기의 우리 결혼생활은 매일 피바다를 건너가는 전투장이었다. 총알이 머리위로 휭휭 날아가는 전쟁터, 서로가 말이라는 날카로운 칼로 서로의 가슴을 찌르는 피튀는 전쟁터 였다 (주로 내가 날뛰었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같은 길 피하려면 돈, 권력, 미모, 직장 같은것 보다 윗 세 조건을 더 먼저 세우고 배우자를 탐색하라. 가정 천국을 초기부터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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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8:54

왜 데이트 하는가?

큰 아들이 데이트 시작한 이후 이 아이와 Katie를 위한 기도의 빈도와 강도가 늘어 났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데이트에 관한 책도 더 뒤적거리게 되었고,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 유학생들을 위한 데이트에 대한 몇가지 제안도 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아이에게 데이트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가 사랑하는 새벽이슬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선 데이트의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혹 "왜 데이트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아 본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게 그같은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과연 왜 데이트를 하는지 물어 보고 할까? 굳이 대답을 해보라고 찔러 대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남들이 하니까. 호기심으로. 심심해서.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대답하는 청년들에게 "데이트의 목적은 결혼 상대자를 찾기위해서"라고 말하면 아주 부담을 가진다. 어떤이는 "그렇게 심각한 데이트 안할래요" 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의 제안이 과연 너무 심각한가? 아니 너무 무리한 기대인가? 나는 그같은 목적이 너무 심각하지도, 지나친 기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의견에 대해서는 크리스쳔 데이트 전문가인 조슈아 해리스나 예수전도단의 리이더이신 딘 셔만 목사님의 제안과 다를바 전혀 없다. 이외에 교수이며 캠퍼스 사역자인 Budziszewski와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형제와 자매가 데이트가 아닌 지체 및 친구의 차원에서 사귄다면 그것은 일대일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 져야 된다. 이같은 공동 모임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그 생각을 살펴 보고, 여럿이 교회나 공동체 모임을 톷해 기도생활 하면서 서로의 신앙을 세워가고 이해해 나가는 것은 아주 좋은 시작이다.  이런 과정속에 서로가 이성의 감정이 생겨나고 혹 이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한 동반자가 아닐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면 데이트라는 단계로 발전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두사람중 한사람 만이라도 그같은 "결혼상대자를 찾기 위한" 동기가 아닐때에는 여럿이 함께 만나는 친교의 차원에 계속 머물러 있는것이 좋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 풍조에 밀려 철없는 데이트를 한다. 감정이 땡기면 감정을 쫓아 가는거다. 욕정이 솟구치면 욕정에 순복하는 거다. 특히 고국을 떠나 외로움에 처해 있는 유학생의 경우 감정에 속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인지 철없는 불장난 같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미국친구들에게 있어 데이트는 성관계를 갖기 위한 전초전이다. 그날 만나서 기숙사로 데리고 오고, 룸메이트가 옆에서 자는데 그냥 관계를 가진다. 이것을 놓고 나는 "타락한 데이트"라고 이름 짖고 싶다.

그같은 세상의 풍조와 삶을 함께 하려는 사고로, 즉 타락한 데이트로 인해 관계에 손상을 체험한 많은 형제.자매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들을 상담하며 체험한 나의 마음은 아직도 몹시 아프다. 그래서 나는 당연코 주장한다.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한 동기가 아닐때에는 결코 데이트를 하지 말라. 주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의 왕권이 이땅에 임하기를 사모하는 새벽이슬같은 우리 청년들은 잘못된 관계로 인해 삶에 묶임당함과 낭비를 허락해서는 안된다.

두번째 중요한 목적이 있다. 데이트는 형제와 자매가 함께 주안에서 하나됨을 훈련하는 기회이다. "교수님, 당장 결혼하는것도 아닌데 왜 갈수록 심한 말을 합니까?"라고 묻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듯 하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의견을 바꿀 수 없다. 이 하나됨의 연습에서 실패하면 결혼이 되어 질 수 없기에 둘이서는 데이트를 더 연장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됨이란 하나님 말씀앞에 둘이서 함께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의 관계를 시작시키고, 유지시키고 또 발전 시키는것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해 간다는 의미도 된다. 이같은 하나됨이 데이트 기간중 확인되어 지지 않은체 결혼하게 되면 위험하다. 따라서 첫번째 목적과 두번째 목적은 어느 하나도 경솔히 다루어져서는 아니된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은 결혼 상대자를 찾기위한 데이트를 하도록 하라.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됨을 연습하는 경건한 데이트를 하도록 하라. 타락한 데이트를 할것인지 경건한 데이트를 할것인지 시작하면서 분명히 정해 놓고 하도록 해야한다.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벧전 5: 8 표준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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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2 23:03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미국에서 대학교수한지 약 16년 된것 같다. 가는곳마다 한국 유학생이 있어서 그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매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되풀이 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한국유학생들의 표절문제 이다. 내가 가르쳤던 모든 학교에서 해마나 예외없이 발생하는 사건이다. 한국학생이 늘어난 탓에 그 문제의 빈도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먼저있던 대학에서 한국학생들의 표절문제는 제법 많은 교수들에게 두통거리였다.

사연을 들어 보면 다양하다. 믿기어려운 흔한 이유중 하나는 "몰라서 그랬어요"이다. 학교 학칙에 그리고 매 수업의 실라버스에 표절을 금하는 사항이 분명히 적혀 있어도 "정말 몰라서 그랬어요"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물론 많은 한국학생들을 지도하고 상담하며 발견하는 문제중 하나가 실라버스를 잘 읽지 않는 경솔함이다 (이문제는 나중에 따로 브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그래도 "잘 모르고 그랬다"는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나늘 위시하여 다른 여러 교수들은 이 문제를 수업첫날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절문제의 시비는 한국에서도 이제는 제법 사회화된 이슈이기 때문이다.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시간을 불성실하게 사용한 경우이다. 갑자기 마감날을 맞추어 글을 쓰자고 하니 무리를 하게 된다. 더우기 편안한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로 써야하는 글이니 표절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책 저책, 혹은 이논문 저 논문에서 조금씩 배끼어 짜집기 한것을 과연 교수가 알겠느냐는 심사로 교묘히 글을 써 나간다.

그러나 학생들의 글을 읽는 교수는 별로 어려움 없이 문제를 잡아낸다. 교수마다 요령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writing style 의 급격한 변화 및 상이한 writing style의 혼합이다. 영어로 글을 많이 쓰고 읽고 또 책을 편집까지 하도록 훈련받은 나의 경우 writing style의 변화 및 논리의 급격한 전환은 마치 빨간색 글자가 갑자기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것 같다. 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빨간색이 주황색으로 바뀌는 듯한 문제의 변화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다보면 의심이 더 확고해지게 된다.

표절행위에 그나마 조금 동정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은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아닌지 그 선을 분명히 이해못해 생기는 경우이다.

이유가 어찌 하였던 표절은 교수에 대해서 보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범죄하는 행위이다. 십계명중 7계명 "도적질 하지 말아라"를 구체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모르고 훔쳐서는 안된다. 모르고 조금만 훔쳐도 안된다. 훔치려는 의도를 가져도 안된다. 믿는자는 남의 글을 빌려올때 어디서 빌려 왔는지 정확히 명시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이고, 믿는자의 능력이다.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믿는자는 교수가 주는 학점에 연연해 해서는 안된다. 믿는자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학점을 더 추구해야만 한다.

이제 학기말이 다가 온다. 텀 페이퍼의 마감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글을 교수에게 제출하기전에 자신을 들여다 보라. 교수가 발견하기전,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 (www.turnitin.com)이 발견하기 이전 스스로 발견하여 회개하고 밤새워서라도 표절의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다음의 웹사이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래에는 표절로 문제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격은 사랑하는 어느 형제의 글이다. 이것을 회개하며 아파하던중 주의 은혜로 만나서 형제를 도울 수 있었다. 긴 간증이라 앞과 뒷 부분을 생략했다. 형제로 부터 다른이들과 이 내용을 나누어도 된다는 허락하에 이곳에 소개하는것이다. 모쪽록 학기말을 은혜가운데 잘 매듭짖기 바란다.

… 중략… 아직 한번도 외국 학생에게는 강의 과목을 맡기지 않았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다른 박사 과정 학생 두명과 같이 시간을 나누어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연구 또한 너무 잘 되었고 한번에 두개의 연구를 학회에 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것들이 너무 잘 이루어지고 하니까 제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진정으로는 내가 잘 나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거야 라고 생각을 한적도 있는것 같습니다. . . . 주위에서는 벌써 박사님 이라고 부르고 다들 부러워하고 하니 빨리 졸업해서 미국에서 교수해야지 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 . .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거만해지고 뽐내며 자랑하는 저였습니다. 그러던중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중지 시키셨습니다. 강의하랴, 연구하랴, 수업 따라 가랴 모든것이 제 욕심으로 채워졌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학기말 수업과제물을 내야 하는데 아이디어도 안떠오르고 해서 교수님들이 하셨던 연구를 그만 베껴서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표절로 징계위원회가 소집이 되었습니다.  교수님들께 용서를 구하는 편지도 써보았고 또 학교에 계시는 한국 교수님이 저희과 교수님 한분 한분 다 만나시며 한번 용서를 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이일이 있기전에는 개인적으로 그 한국 교수님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좋았었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분의 통계수업을 꼭 두과목 이상 들어야 했는데 한국 학생과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엄격하시고 점수도 잘 안주시는것 같아 사실 싫어했습니다. 또한 저의 박사 논문 커미니 멤버로 들어오실수도 있어서 저는 아예 다른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제가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 알고 계셨다면서 최선을 다해 이번일이 잘 풀릴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의 모습과는 다르시게 너무 온화하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된 이후로 매일같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의 교만함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신 좋은 기회와 시간들을 헛되이 썼습니다. 주님 저 이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싶습니다. 주님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신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중에 그 미워했던 한국교수님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일을 통하여 그분과의 관계회복을 원하시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마음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에게 너무 잘해주면 공부도 안하고 너무 교수만을 의지할것 같고 또 박사과정 학생이니까 그만큼의 기대치가 있으셨는데 제가 그만큼 못한것을 그분탓으로 돌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일을 통하여 제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저의 교만함과 관계회복 이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기도하면서 “왜 이런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 분야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아주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한순간에 공부를 그만하게 되었다니..지금까지 학부, 석사, 박사 과정까지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왜 이런일이..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났나요???  하지만 이일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시련은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주님으로 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사탄으로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자기의 욕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다고 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되고 결정이 나기를 1년 정학을 주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하지만 1년후 다시 입학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그곳에서 계속 공부하는것이 안좋을수도 있을것 같고 성적표에 계속 꼬리표가 따라다닐거라는 생각에 학교를 옮기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학교를 나와 다른학교로 편입준비를 하게되었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벌써 제가 다녔던 학교에 전화를 걸어 왜 이학생이 편입을 하려는지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를 나오게되면서 그곳에 있는 교수님들께서는 이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약속하셨지만 한분의 교수님이 학회에서 친한 한국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옮기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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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23:03

교수님, 귀국해서 신앙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형제.자매들로 부터 여러 이멜을 받는다. 몇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모국이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지체들로 부터 승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몹시 신난다. 그러나 얼마전 받은 다음과 같은 이멜은 내 마음을 어둡게한다. “교수님, 한국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요.”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미국에서 유학할때 신앙생활 느슨했으면, 모국에서도 느슨해지지. 처음엔 느슨해 지다가 조금있으면 완전히 확 풀려버릴 수 있어.” 이 말을 해야 하는 내 마음은 아려온다.

불행히도 나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틀린말 같지 않다. 광야같은 유학생활은 그나마 긴장이 되고, 깨어 있어야 하니, 늘상 안하던 기도도 하고, 교회도 꼬박꼬박 나가게 된다. 또 금요일 별로 할것이 없으니 성경공부도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고 본인이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학생활때 헌신된 신앙생활 하지 않았면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성경공부를 자주 나갔다 할지라도 귀국이후 신앙은 곧 흩어진다. 물론 좋은 교회에서 헌신된 신앙인을 만나서 그들과의 교제를 통해 신앙이 업그레이드 되는경우도 간헐적으로 보았다. 또 어떤경우는 삶의 각별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체험하게 되는경우도 보았다. 물론 이것 말고도 다른 예외도 얼마든지 있을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학생활중 습득된 신앙습관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어진다.

유학시절 전도 하지 않았는데 귀국하여 성실히 전도하는 지체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유학시절 매일 큐티하지 않던이가 모국에 가서 갑자기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달게 먹으며 살아간다는 지체를 만나지 못했다. 유학시절 다른 지체를 위해 중보하지 않던이가 귀국하여 나를 위해 중보하고 있다고 하는 지체를 못 만났다.

이곳 유학생활에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모국에서도 그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철저한 신앙생활이란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켜지는 것이다. 교실에서도, 식당에서도, 길을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놀면서, 교회에서 청소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지금 나의 신앙생활은 내일의 삶을 아주 잘 예측하게 해준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죽어라고 사랑하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라. 또 다음날도그러면 귀국해서도 하나님과의 사랑은 식어지지 않고 더 불이 붙는다.

* 윗 사진은 Google Image Search (http://images.google.com/)에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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