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2.15 교회안에서 이성교제 (어느 이멜에 대한 답신)
  2. 2009.01.12 시간을 보는 시각
  3. 2008.12.11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으면 결혼할만 하다
  4. 2008.12.08 왜 데이트 하는가?
  5. 2008.12.02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6. 2008.11.16 교수님, 귀국해서 신앙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2010.02.15 13:45

교회안에서 이성교제 (어느 이멜에 대한 답신)

얼마전 익명의 자매로 부터 이멜을 받았다. 유학하며 남자 친구를 만나서 교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였던 것은 교제를 통해 두 사람이 주안에서 더 아름답게 성장해 간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 하고,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상상만 하여도 흐뭇한 일이였다. 더우기 관계를 통해 신앙과 학업에 성장이 있다니 참으로 기뻤다. 서로가 사랑함으로 결혼에 대해 확신도 생긴다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혼전 형제와 자매가 흔히 격게 되는 스킨쉽의 문제도 서로가 주안에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 감사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좋은 이성교재에 부모님의 반대가 있다고 하였다. 부모님은 근본적으로 교회에서의 이성교제를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였고, 관계를 정리해라고 하여 자매가 몹시 힘들어 하였다. 따라서 나는 이같은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내 생각을 듣고 싶다고 해서 이멜을 보낸것이다. 나는 이땅의 유학생 가운데 자매와 흡사한 질문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이성교제의 단계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나의 이멜 답신을 약간 수정하여 (불필요한 내용 삭제하였음) 이곳에 소개하려고 한다. 
자매님,

답장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이멜을 읽고 또 읽어 보니 두사람의 교제에 좋은 열매들이 보입니다. 신앙의 성숙, 격려, 중보... 주님께 찬양드릴 항목들 입니다. 

교회안에서의 이성교제가 비성경적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교회안에서의 이성교제를 성경적이라고 보고 있고, 비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저는 오히려 창세기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것을 좋지 못하게 여기셔서 여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돕는 베필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만나는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그같은 관계를 건강하게 갈 수 있도록 잘 가이드해 주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노는것도 교회에서 놀며 교회에서 가이드 해주어야 하구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이성교제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성도들의 놀이를 가르쳐 줍니다. 그 결과는 당연합니다. 빛에서 사귀고 놀지 못하고 음지에서 사귀고 놀게 되기에 타락하거나 신앙이 무너지는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교회에서 이성을 사귀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라는 질문 보다, 어떻게 사귀는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것 (창조후 "보기에 좋았더라"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지를 묻고 고민하고 분별하는것이 더 좋은 질문이라고 봅니다. 두 사람의 사귐이 서로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두 사람의 사귐이 교회내의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이런것들을 살펴보는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두사람 서로의 우상이 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방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관계를 아주 싫어 하십니다. 두사람만의 교제는 다른 지체들과의 공동체생활의 틈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자라감을 방해 합니다. 

부모님의 염려는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부모로서 학업중인데 "연애" 하고 있다면 염려가 얼른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인 나도 그랬구요. 그러나 신앙을 가진 어르신들을 위해 두 사람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부모님들이 염려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모님 공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두사람의 관계가 아주 보기 좋고 또 서로가 주안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염려 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결혼전의 스킨 쉽으로서 서로 자제를 하고 있지만 둘이서 분명한 선을 긋는것은 좋을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손잡는것, 안아주는것외에 키스, 애무 등을 금한다는 분명한 선 이지요. 금년에 결혼하는 나의 아들 상민과 미국아이 Katie는 처음부터 손잡고 어깨동무, 안아주는것은 넘지 않기로 주안에서 약속하고 사귀도록 서로 결정 하였습니다. 약혼을 한 지금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고, 어려울때는 중보기도를 부탁해 오곤 합니다. 손을 잡되, 형제의 손이 자매의 팔 이상 올라오지 않게 하고, 어깨동무를 하되 그 손이 은근히 가슴으로 오지 않도록 분명한 선을 그으십시오. 형제님이 들으면 왠 날벼락이냐고 하겠지만, 주안에서 성숙한 형제이니 잘 지켜 나갈 것입니다. :-) 그리고 자매님은 성숙하기에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복장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나셔야 합니다. 한 여름에 긴 코트 입고 나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기에 적합한 복장인지 물어 보고 입으시면 형제가 눈으로 시험받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고린도 전서 10:31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목적이 되어서 교제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셔야 합니다. 
 
긴 질문에 다소 짦에 대답하였지만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샬롬!
사진출처: 
http://lifeinthenhs.wordpress.com/2009/03/26/locking-the-stable-door-after-the-horse-has-bol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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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0:05

시간을 보는 시각

예로 부터 지금까지 시간이라는 주제는 많은이들로 부터 뜨거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과 관련된 주제로 출판된 수없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산업혁명이후부터 계속적으로 효율성, 생산성 및 속도에 대한 개념과 그 틀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은 한 인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고 성공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누구누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했다더라. 그런데 누구 누구는 9년이 지나도 마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3년내에 마친 박사는 능력이 있는자이며 성공한 자로 얼른 구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9년동안 학위가 마쳐지지 않은 학생은 무능한자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게을음으나 자포자기로 미루어지는 공부가 있기도 하다. 주변을 바라 보았을때 늦게 마친자가 빨리 마친자보다 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아가고 또 자신의 학문분야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개인을 떠나 집단의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개척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벌써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어느 어느 교회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교인수가 약 500여명 밖에 안된다. 2년에 1만명 가진 교회는 분명 성공한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닮아 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것이다. 반면 10년간 500명의 교인을 갖춘 교회는 얼핏 다른 교회가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칭찬 받고 책망 받는 교회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시록에서 칭찬 받은 교회는 그 크기와 빠른 성장 때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뭏든 시간에대한 관점은 어떤 잣대 (Yard Stick)을 가지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많이 살면 70-80년 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속도와 생산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서 숨쉬는 제한된 시간내에 더 많은것 보아야 하고, 해야하고, 경험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며, 또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자기몰입적인 달음질을 하는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허무를 위한 달음질"이 될 수 있다. "조금 더"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루었지만, 나 보다 조금 더 이룬 삶 앞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 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가 영원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의 속도와 생산량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생한 (born-again)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나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가, 방향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보다 더 중요 하다. 그리고 불필요한것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How much and how fast)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 (What)을 "어떻게" (How)  생산하는냐를 더 중요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한 확장보다, 천국의 확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천국확장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을 평가해줄 절대평가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안다. 현세에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찬사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의 평가에 더 관심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Formular를 제안해 본다: 

      1. 삶 = 생산량 (업적) ÷ 속도 (속도가 빠를 수록 삶의 숫자가 많고 그것이 삶을 결정한다)
      2. 삶 = 방향 x 믿음 (삶의 올바른 방향과 믿음의 충돌이 삶을 결정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공식은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두가지 공식을 놓고 생각해볼 일이다. 첫번째 공식으로 살때 나의 삶과, 가정, 이웃은 어떤 모습일까?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돈 벌어 더 많이 빨리 쓰고, 더 빨리 인생을 마칠것인가? 더 빨리 인생을 마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같은 삶이 사회에 기여하는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그리고 빠른 생산을 통해 더 빠른 그리고 많은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가?

가야할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자에게는 샬롬의 삶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을 망하리로다" (시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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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1 02:40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으면 결혼할만 하다

캠퍼스나 코스타에서 청년들과 대화 나누다 보면 흔히 부딛히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교수님, 어떤 사람하고 결혼해야 되요?" 청년들중 일부는 더욱 구체적일때가 있다. "지금 사귀는 자매 (혹은 형제)가 몇명 되는데 그중 누가 적합할까요?" "교수님, 막연하지만 결혼 대상자를 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어느날 내 앞에 형제 (혹은 자매)가 나타나면 어떻게 분별하지요?" 청년들에게 있어 배우자 선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을 제법 심각히 고민해 보기도 하였다. 물론 몇명을 한꺼번에 사귀며 그중 하나를 찍으려는 심사를 가진 청년들과의 대화는 좀 더 길어 진다. 왜냐하면 다루어야할 문제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올렸던 글 가운데 데이트의 목적이 결혼을 전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데이트는 하나됨의 연습이라 하였다. 오늘 결혼 대상자에 대한 몇가지 제안을 해 보려고 한다. 물론 내가 결혼 전문가가 아니기에 신앙을 가진 인생선배로서 개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고와 미국의 잘 알려진 청년사역자들 (Budziszewski교수, Spencer교수, Opitz교수, Melleby교수)의 나눔을 참고 하였다.

첫째, 헌신된 크리스챤과 결혼하라. 매우 독선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을 누가 전도하느냐고 금방 반격 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믿지 않지만 전도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다. 굳이 불신자를 포기할 수 없다면 최소한 세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겠다. 전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때 까지 기다리던가, 그때가 안오면 결혼을 포기하던가, 아니면 그냥 결혼하여 믿음을 잃을 확율을 높일뿐 아니라 심한, 아주 치열한 영적전쟁으로 들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결혼은 신앙인들끼리의 만남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돕는 베필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것이다. 성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첫번재 조건이 빗나가면 아래 두가지 다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도 첫번재 조건이 중요한 이유이다.

둘째본인을 진리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자 라야 한다 (본인 또한 상대를 그렇게). 진리라 함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두사람이 해야할 일, 해서는 안될 일들, 닮아야할 또 닮지 말아야할 인격적인 문제에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진리안에서 사랑이 이루어 져야한다. 이같이 진리안에 거하는 사랑은 관계속에서 악인들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시편 1: 1)에 들어 가지 않도록 서로 견제해 주며 성품이 아름답게 자라가게 되고, 관계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세워간다.

주님께 헌신된 아내와 데이트 하던 과거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신앙이 희미했던 그당시, 아내의 이상한 발언으로 인해 나는 마음이 몹시 상한적이 있었다. 그 자매왈: “나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두번째 사랑해요!”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서 너 그러면 하나님과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내 뱉고는 여러날을 만나지 않은적 있다. 사랑에서 두번째 서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 자매의 그같은 버릇은 아직 남아 있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거나, 오만한 생각 혹은 행위를 할때 칼 맞더라도 성경말씀 인용하며 권면해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내가 옆길로 빠질때 나 또한 점잔만 빼지 않는다. 진리안에서의 사랑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관계로서 발전한다 (시편 1: 3). 그 결과는 풍성한 열매와 주안에서의 형통이다.

세번째, 좋은 엄마.아빠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어야 한다. 데이트할때 이런 것이 일찍 분별 되어 결혼에 까지 이르면 아름답다. 아이들이 장성한후 나처럼 나중에 주안에서 자라나 좋은 아빠가 되려 하면 참으로 힘들다. 내가 전에 올린
자녀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 책이란 제목의 글을 읽에 바람직 하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나의 아픔이 적혀 있다. 사귀는 자매가 진리안에서 좋은 엄마, 또 형제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눈여겨 보아야 한다.

돈많고 좋은 직장 좋은 배경의 남자.여자가 그 조건에 들어 있다면 앞으로 피바다를 지나는 살벌한 부부관계를 생각하며 결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아내를 만날때 그냥 두가지만 보았다. 첫째로 그가 자매였고 (형제하고는 결혼이 안되니까), 둘째로 내 눈에 보암직 스러웠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교회에서 집사도 하고, 또 성경공부도 인도하며,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제법 헌신된 형제인것 같아 보여서 속아서 결혼했다. 초기의 우리 결혼생활은 매일 피바다를 건너가는 전투장이었다. 총알이 머리위로 휭휭 날아가는 전쟁터, 서로가 말이라는 날카로운 칼로 서로의 가슴을 찌르는 피튀는 전쟁터 였다 (주로 내가 날뛰었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같은 길 피하려면 돈, 권력, 미모, 직장 같은것 보다 윗 세 조건을 더 먼저 세우고 배우자를 탐색하라. 가정 천국을 초기부터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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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8:54

왜 데이트 하는가?

큰 아들이 데이트 시작한 이후 이 아이와 Katie를 위한 기도의 빈도와 강도가 늘어 났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데이트에 관한 책도 더 뒤적거리게 되었고,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 유학생들을 위한 데이트에 대한 몇가지 제안도 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아이에게 데이트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가 사랑하는 새벽이슬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선 데이트의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혹 "왜 데이트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아 본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게 그같은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과연 왜 데이트를 하는지 물어 보고 할까? 굳이 대답을 해보라고 찔러 대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남들이 하니까. 호기심으로. 심심해서.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대답하는 청년들에게 "데이트의 목적은 결혼 상대자를 찾기위해서"라고 말하면 아주 부담을 가진다. 어떤이는 "그렇게 심각한 데이트 안할래요" 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의 제안이 과연 너무 심각한가? 아니 너무 무리한 기대인가? 나는 그같은 목적이 너무 심각하지도, 지나친 기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의견에 대해서는 크리스쳔 데이트 전문가인 조슈아 해리스나 예수전도단의 리이더이신 딘 셔만 목사님의 제안과 다를바 전혀 없다. 이외에 교수이며 캠퍼스 사역자인 Budziszewski와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형제와 자매가 데이트가 아닌 지체 및 친구의 차원에서 사귄다면 그것은 일대일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 져야 된다. 이같은 공동 모임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그 생각을 살펴 보고, 여럿이 교회나 공동체 모임을 톷해 기도생활 하면서 서로의 신앙을 세워가고 이해해 나가는 것은 아주 좋은 시작이다.  이런 과정속에 서로가 이성의 감정이 생겨나고 혹 이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한 동반자가 아닐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면 데이트라는 단계로 발전해 갈 수 있다. 그러나 두사람중 한사람 만이라도 그같은 "결혼상대자를 찾기 위한" 동기가 아닐때에는 여럿이 함께 만나는 친교의 차원에 계속 머물러 있는것이 좋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 풍조에 밀려 철없는 데이트를 한다. 감정이 땡기면 감정을 쫓아 가는거다. 욕정이 솟구치면 욕정에 순복하는 거다. 특히 고국을 떠나 외로움에 처해 있는 유학생의 경우 감정에 속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인지 철없는 불장난 같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미국친구들에게 있어 데이트는 성관계를 갖기 위한 전초전이다. 그날 만나서 기숙사로 데리고 오고, 룸메이트가 옆에서 자는데 그냥 관계를 가진다. 이것을 놓고 나는 "타락한 데이트"라고 이름 짖고 싶다.

그같은 세상의 풍조와 삶을 함께 하려는 사고로, 즉 타락한 데이트로 인해 관계에 손상을 체험한 많은 형제.자매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들을 상담하며 체험한 나의 마음은 아직도 몹시 아프다. 그래서 나는 당연코 주장한다.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한 동기가 아닐때에는 결코 데이트를 하지 말라. 주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의 왕권이 이땅에 임하기를 사모하는 새벽이슬같은 우리 청년들은 잘못된 관계로 인해 삶에 묶임당함과 낭비를 허락해서는 안된다.

두번째 중요한 목적이 있다. 데이트는 형제와 자매가 함께 주안에서 하나됨을 훈련하는 기회이다. "교수님, 당장 결혼하는것도 아닌데 왜 갈수록 심한 말을 합니까?"라고 묻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듯 하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의견을 바꿀 수 없다. 이 하나됨의 연습에서 실패하면 결혼이 되어 질 수 없기에 둘이서는 데이트를 더 연장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됨이란 하나님 말씀앞에 둘이서 함께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의 관계를 시작시키고, 유지시키고 또 발전 시키는것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해 간다는 의미도 된다. 이같은 하나됨이 데이트 기간중 확인되어 지지 않은체 결혼하게 되면 위험하다. 따라서 첫번째 목적과 두번째 목적은 어느 하나도 경솔히 다루어져서는 아니된다.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은 결혼 상대자를 찾기위한 데이트를 하도록 하라. 그리고 주 안에서 하나됨을 연습하는 경건한 데이트를 하도록 하라. 타락한 데이트를 할것인지 경건한 데이트를 할것인지 시작하면서 분명히 정해 놓고 하도록 해야한다.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벧전 5: 8 표준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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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2 23:03

표절은 생각하지도 말라

미국에서 대학교수한지 약 16년 된것 같다. 가는곳마다 한국 유학생이 있어서 그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매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되풀이 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한국유학생들의 표절문제 이다. 내가 가르쳤던 모든 학교에서 해마나 예외없이 발생하는 사건이다. 한국학생이 늘어난 탓에 그 문제의 빈도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먼저있던 대학에서 한국학생들의 표절문제는 제법 많은 교수들에게 두통거리였다.

사연을 들어 보면 다양하다. 믿기어려운 흔한 이유중 하나는 "몰라서 그랬어요"이다. 학교 학칙에 그리고 매 수업의 실라버스에 표절을 금하는 사항이 분명히 적혀 있어도 "정말 몰라서 그랬어요"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물론 많은 한국학생들을 지도하고 상담하며 발견하는 문제중 하나가 실라버스를 잘 읽지 않는 경솔함이다 (이문제는 나중에 따로 브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그래도 "잘 모르고 그랬다"는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나늘 위시하여 다른 여러 교수들은 이 문제를 수업첫날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절문제의 시비는 한국에서도 이제는 제법 사회화된 이슈이기 때문이다.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시간을 불성실하게 사용한 경우이다. 갑자기 마감날을 맞추어 글을 쓰자고 하니 무리를 하게 된다. 더우기 편안한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로 써야하는 글이니 표절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책 저책, 혹은 이논문 저 논문에서 조금씩 배끼어 짜집기 한것을 과연 교수가 알겠느냐는 심사로 교묘히 글을 써 나간다.

그러나 학생들의 글을 읽는 교수는 별로 어려움 없이 문제를 잡아낸다. 교수마다 요령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writing style 의 급격한 변화 및 상이한 writing style의 혼합이다. 영어로 글을 많이 쓰고 읽고 또 책을 편집까지 하도록 훈련받은 나의 경우 writing style의 변화 및 논리의 급격한 전환은 마치 빨간색 글자가 갑자기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것 같다. 좀 어려운 경우도 있다. 빨간색이 주황색으로 바뀌는 듯한 문제의 변화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다보면 의심이 더 확고해지게 된다.

표절행위에 그나마 조금 동정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은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아닌지 그 선을 분명히 이해못해 생기는 경우이다.

이유가 어찌 하였던 표절은 교수에 대해서 보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범죄하는 행위이다. 십계명중 7계명 "도적질 하지 말아라"를 구체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모르고 훔쳐서는 안된다. 모르고 조금만 훔쳐도 안된다. 훔치려는 의도를 가져도 안된다. 믿는자는 남의 글을 빌려올때 어디서 빌려 왔는지 정확히 명시해야 한다. 그것은 정직이고, 믿는자의 능력이다.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믿는자는 교수가 주는 학점에 연연해 해서는 안된다. 믿는자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학점을 더 추구해야만 한다.

이제 학기말이 다가 온다. 텀 페이퍼의 마감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다. 글을 교수에게 제출하기전에 자신을 들여다 보라. 교수가 발견하기전,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 (www.turnitin.com)이 발견하기 이전 스스로 발견하여 회개하고 밤새워서라도 표절의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다음의 웹사이트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래에는 표절로 문제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격은 사랑하는 어느 형제의 글이다. 이것을 회개하며 아파하던중 주의 은혜로 만나서 형제를 도울 수 있었다. 긴 간증이라 앞과 뒷 부분을 생략했다. 형제로 부터 다른이들과 이 내용을 나누어도 된다는 허락하에 이곳에 소개하는것이다. 모쪽록 학기말을 은혜가운데 잘 매듭짖기 바란다.

… 중략… 아직 한번도 외국 학생에게는 강의 과목을 맡기지 않았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다른 박사 과정 학생 두명과 같이 시간을 나누어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연구 또한 너무 잘 되었고 한번에 두개의 연구를 학회에 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것들이 너무 잘 이루어지고 하니까 제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진정으로는 내가 잘 나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거야 라고 생각을 한적도 있는것 같습니다. . . . 주위에서는 벌써 박사님 이라고 부르고 다들 부러워하고 하니 빨리 졸업해서 미국에서 교수해야지 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 . .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거만해지고 뽐내며 자랑하는 저였습니다. 그러던중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중지 시키셨습니다. 강의하랴, 연구하랴, 수업 따라 가랴 모든것이 제 욕심으로 채워졌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학기말 수업과제물을 내야 하는데 아이디어도 안떠오르고 해서 교수님들이 하셨던 연구를 그만 베껴서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표절로 징계위원회가 소집이 되었습니다.  교수님들께 용서를 구하는 편지도 써보았고 또 학교에 계시는 한국 교수님이 저희과 교수님 한분 한분 다 만나시며 한번 용서를 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사실 이일이 있기전에는 개인적으로 그 한국 교수님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좋았었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분의 통계수업을 꼭 두과목 이상 들어야 했는데 한국 학생과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엄격하시고 점수도 잘 안주시는것 같아 사실 싫어했습니다. 또한 저의 박사 논문 커미니 멤버로 들어오실수도 있어서 저는 아예 다른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제가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 알고 계셨다면서 최선을 다해 이번일이 잘 풀릴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의 모습과는 다르시게 너무 온화하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된 이후로 매일같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의 교만함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신 좋은 기회와 시간들을 헛되이 썼습니다. 주님 저 이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싶습니다. 주님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신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중에 그 미워했던 한국교수님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일을 통하여 그분과의 관계회복을 원하시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마음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에게 너무 잘해주면 공부도 안하고 너무 교수만을 의지할것 같고 또 박사과정 학생이니까 그만큼의 기대치가 있으셨는데 제가 그만큼 못한것을 그분탓으로 돌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일을 통하여 제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저의 교만함과 관계회복 이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기도하면서 “왜 이런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내 분야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아주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한순간에 공부를 그만하게 되었다니..지금까지 학부, 석사, 박사 과정까지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왜 이런일이.. 주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났나요???  하지만 이일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시련은 아니었습니다. 시험은 주님으로 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사탄으로부터 오는것도 아니고 자기의 욕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다고 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소집되고 결정이 나기를 1년 정학을 주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하지만 1년후 다시 입학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그곳에서 계속 공부하는것이 안좋을수도 있을것 같고 성적표에 계속 꼬리표가 따라다닐거라는 생각에 학교를 옮기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학교를 나와 다른학교로 편입준비를 하게되었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벌써 제가 다녔던 학교에 전화를 걸어 왜 이학생이 편입을 하려는지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를 나오게되면서 그곳에 있는 교수님들께서는 이일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약속하셨지만 한분의 교수님이 학회에서 친한 한국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옮기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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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23:03

교수님, 귀국해서 신앙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형제.자매들로 부터 여러 이멜을 받는다. 몇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모국이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지체들로 부터 승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몹시 신난다. 그러나 얼마전 받은 다음과 같은 이멜은 내 마음을 어둡게한다. “교수님, 한국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요.”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미국에서 유학할때 신앙생활 느슨했으면, 모국에서도 느슨해지지. 처음엔 느슨해 지다가 조금있으면 완전히 확 풀려버릴 수 있어.” 이 말을 해야 하는 내 마음은 아려온다.

불행히도 나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틀린말 같지 않다. 광야같은 유학생활은 그나마 긴장이 되고, 깨어 있어야 하니, 늘상 안하던 기도도 하고, 교회도 꼬박꼬박 나가게 된다. 또 금요일 별로 할것이 없으니 성경공부도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고 본인이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학생활때 헌신된 신앙생활 하지 않았면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성경공부를 자주 나갔다 할지라도 귀국이후 신앙은 곧 흩어진다. 물론 좋은 교회에서 헌신된 신앙인을 만나서 그들과의 교제를 통해 신앙이 업그레이드 되는경우도 간헐적으로 보았다. 또 어떤경우는 삶의 각별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체험하게 되는경우도 보았다. 물론 이것 말고도 다른 예외도 얼마든지 있을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학생활중 습득된 신앙습관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어진다.

유학시절 전도 하지 않았는데 귀국하여 성실히 전도하는 지체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유학시절 매일 큐티하지 않던이가 모국에 가서 갑자기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달게 먹으며 살아간다는 지체를 만나지 못했다. 유학시절 다른 지체를 위해 중보하지 않던이가 귀국하여 나를 위해 중보하고 있다고 하는 지체를 못 만났다.

이곳 유학생활에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모국에서도 그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철저한 신앙생활이란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켜지는 것이다. 교실에서도, 식당에서도, 길을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놀면서, 교회에서 청소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지금 나의 신앙생활은 내일의 삶을 아주 잘 예측하게 해준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죽어라고 사랑하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라. 또 다음날도그러면 귀국해서도 하나님과의 사랑은 식어지지 않고 더 불이 붙는다.

* 윗 사진은 Google Image Search (http://images.google.com/)에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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