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2.07.13 시카고 코스타 2012
  2. 2009.11.10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3. 2008.10.22 매 (Hawk)와 놀던 다람쥐
  4. 2008.04.19 기독유학생의 언어 사용
  5. 2008.04.19 단순함으로 승리하자
2012.07.13 13:28

시카고 코스타 2012

한달간의 모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흘뒤 우리는 시카고를 향해 달렸다. 그날은 주일이였고 코스타 집회가 열리기전 jjKOSTA (조장코스타) 참석을 위해 하루 일찍 가야 하였다. 물론 조장들과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에 찬양을 부르며 아내와 막내 영민을 태우고 3시간 반을 운전하여 휘튼대학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도착즉시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다. 성령의 바람인가? 센 바람을 피해 빌리 그래햄 빌등에 들어선 순간 소나기와 천둥이 퍼 부어 졌다. 그뒤 정전이 되어 방이 어두어 졌고. 한시간 뒤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길가에 나무가 쓰러져 길이 막혀 조금 먼길로 돌아오는 이가 있다고 하더니, 홈 디폿으로 임시 발전기를 사러 가야된다는 등의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의 정상적으로 멘토모임을 갖고, 기도하고, 예배로 돌입했다. 

이렇게 시작된 코스타는 거센 바람과 천둥과 비교 할 수 없는 은혜의 소나기, 우리의 기존 생각을 뒤흔든 진리의 천둥이 예배때마다 발생하였다. 지금까지온 코스타중 이렇게 큰 도전이 없었다. 오전의 주제 강의와 저녁 집회의 간증 및 강의는 말 그대로 도전과 축복이었다. 집회중 눈물도 흘리고 마음다해 찬양 드리고...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금년의 찬양팀은 내 마음을 주께로 바짝 다가 서게 하였다. 찬양팀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고, 또 찬양인도자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찬양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였다. 

금년의 강의 제목은 "인생의 지독하고 교묘한 시험 앞에서"라는 강의였다. 성경에 번역된 "시험"이란 우리 단어가 가진 pirasmos와 piradzo를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해 치르는 인생의 지독한 시험 (pirasmos)의 한 측면과 그 같은 시험에 미끄러지게 하는 교묘한 유혹 (piradzo)에 대한 강의 였다. 세번 강의 하였는데 기본 틀은 같지만 세번 강의에 사용된 예들이 달랐다. 강의 순간 마다 주의 인도하심을 바랬고 또 민감하려 하였다. 강의중 떠오르는 예화들이나 나의 삶의 나눔은 모두가 계획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강의 듣는 이들은 몰랐지만 나는 내심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그래도 떠오르는 생각과 감동을 밀어 내지 않고 순응하며 나갔다.

이 밖에도 아내와 나는 "고부갈등"에 대해 강의 하였다. 주로 아내가 인도 하였다. 참 잘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강의실로 모여들어 아내는 참가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 듣고 기도해주기 보다 말을 더 많이 하였다고 참으로 아쉬워 하였다. 

이외 아내와 나는 강의 코스타 조장들의 멘토로 섬겼다. 멘토는 밤과 낮에 다 사역한다. 매 식사시간 조별모임에 초대되어 삶을 나누고, 저녁 조별모임에 심층대화로 초대 받아 대화를 나누며 함께 기도한다. 새벽에 집에 들어 오면 11살 짜리 영민이는 방에 혼자 자고 있다. 물론 전화로 서로 통화하며 아이에게 우리의 근황과 위치를 계속 설명해 준다. 


금년 코스타 사역은 유난히 의미가 깊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두 청년을 예비하셨던것 같다. 이번 집회중 청년 둘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한 청년은 둘째날있었던 구원초청에 일어났다가 마음을 다시 바꾸어 중간에 그냥 앉아 버려 그 청년을 섬겼던 조장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4대째 원불교를 섬겨오던 가정에서 자라온 형제라 복음을 전하며 많은 방해를 받았다. 복음 제시후 영접기도로 들어가려 할때 갑자지 머리가 아픈 현상이며 또 혼미해 지는 현상이 바로 형제를 공격한 악한 영의 방해였다. "나사렛 예수이름"을 부르며 방해자가 물러가기를 명한뒤 형제의 wife와 더불어 기숙사 지하실에서 함께 소리내어 찬양을 하였다. 찬양을 마치고 형제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교수님, 저 영접할래요"라고 말하였다. 주저치 않고 인도하였고 우리는 함께 기쁨의 눈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뻐 하였다.이 형제는 화요일 첫강의를 들었던 형제고 또 강의중 좋은 질문을 한 형제이었다. 할렐루야! 

화요일 두번째 강의에 어느 형제를 만났다. 강의를 듣던 여러 지체중 유난히 내 눈에 들어왔던 형제이다. 왜냐하면 강의를 듣는 형제의 눈이 너무 갈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강의를 마친후 80분 강의를 15분의 휴식을 두고 두번 연속하여 나의 관절이 너무 아팠다. 걸음이 잘 걸리지 않아 아픔을 무릎쓰고 그냥 몸을 끌고 식당을 향하 던중 어느 커플이 눈에 띄였다. 둘이 손잡고 걷는 모습이 너무 보기좋아 시비를 걸어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까지고 고통이 나를 붙잡고 있어서 내 강의중 내 시선을 끌었던 지체였음도 알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하루 잊고 목요일 저녁 내가 섬기는 지역의 어느 조장이 저녁식사때 자기 조원들과 함께 먹자고 초대하여 응하였다. 자기 조원중 한 형제가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는것 같다고 보고 하였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조장의 이야기한 형제가 바로 내 강의에서 내 눈을 끌고 또 길에서 내가 시비걸었던 바로 그 형제였다. 일부러 그 옆자리를 선택하여 첫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이 좋으세요?" 그의 대답을 들으며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형제임을 알았고 식사후 그 형제와 그의 아내되는 자매를 이끌고 강사숙소의 어느 휴계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냐고 하자 질문이 하나 있다고 한다. 중보기도실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너무 잘못했다는 생각에 "하나님 죄송해요"하는 고백을 조용히 혼자 눈물 뚝뚝 흘리며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성령의 만지심, 그것없이 회개에 이룰 수 없는데 성령께서 이미 형제를 그렇게 만지신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교수님, 준비 되었어요!"라고 하는 것이다. 형제의 손을 잡고 영접기도를 인도하였고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그다음날 아침 형제가 속한 조의 조장의 보고가 참으로 귀했다. 과묵하여 말을 하지 않던 그 형제가 그 구원의 순간을 밝은 얼굴로 간증하며 말을 많이 하더라는 것이다. 할렐루야!


코스타를 섬기는 기쁨의 절정을 바로 이같은 순간들이다. 내가 한것이 아니라 좋은 강의들과 찬양들, 조장의 섬김, 조원들의 기도들, 그리고 나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정말 큰 기쁨이다. 새 생명의 태어남은 정말 기쁘다. 이제 이들이 잘 자라나도록 이제 중보해야 하고 섬겨야 하겠다. 이들과 더불어 상담하였던 여러 지체들을 포함하여. 


사진출처: https://www.facebook.com/kosta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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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4:38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죄가 관영하는 이 세상에서 미끄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며, 거룩한 신앙인으로 책망할것 없는 삶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숨쉬기를 할때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어 밷을 수 있듯, 주의 말씀을 그렇게 자연스레 순종해 가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야무진 공상일까?

 위의 질문 뒤에는 나의 미끄러짐으로 인한 아픔이 숨어 있다. 내게 있어 미끄러 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크게 벗어났던 작게 벗어 났던지간에 내게 있어서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이 미끄러 넘어졌을땐 더욱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의 한심한 신앙생활로 인해 눈물을 그렁이며 아파하기도 한다. 더우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는 데서 미끄러졌을 경우 나는 더욱 좌절한다. “그렇게 살아 가면서 어떻게 캠퍼스 사역한다고 하고, 교회에서 설교 하고, 학생들 상담하지?” 라고 묻는것 같다. 아 내게 이같은 미끄러짐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미끄러짐에는 나의 부주의가 많다. 미끄러운곳을 걸어갈때는 긴장도 해야 하는데 그냥 방심하고 진행할때 미끄러진다. 내 발걸을음 잘 점검하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을 기도를 통해, 또 말씀을 통해 분별해 가면서 지혜롭게 가면 미끄러짐을 극소화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적 부주의는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한다. 늘 익숙해진 대학 캠퍼스가 내 생활의 주요 무대인 나에게는 영적인 긴장감을 갖기 보다는 늘 가던곳이고 하던 것이니 방심하게 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늘 만나고 얼굴을 대하는 편안한 가족이기에 말에서나 행동에서 실수할때가 있다. 아내에게 무례한다던가, 아이들의 말을 온전히 귀담아 들으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방심하고 있을때가 있다. 

일상생활의 부주의가 미끄러짐의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장애물은 나의 교만이다. 나의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함 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때 흔히 나타난다. 나의 경우 교만은 나 혼자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길이 더 안전해 보이고 더 지혜로와 보이는 것이다. 그같은 교만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향해 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이같은 생각이 내게 들어온 순간 나는 이미 미끄러진것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교만은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중요시 하게 된다. 일단 그같은 상황에 놓이면 세상것이 주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되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내가 나를 위해 만들고 싶은 그런 세계 및 상황을 바라게 된다. 이쯤되면 또한 내 왕국을 만들어 보려는 동기로 먹고 마시며, 뛰고, 쉬고, 일하게 된다. 나는 이같은 상황을 미끄러져 내동냉이쳐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빼먹지 말아야할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미끄러짐은 나의 회개의 문제와 아주 깊숙히 맞물려 있다. 입으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냥 자동적으로 용서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신앙생활 초기 특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적이 있었다. 이같은 회개는 변화를 동반하지 않기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게 된다. 그러나 때론 입술의 고백을 떠나 마음의 고백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아픈 마음으로 주께 용서를 부르짖는다. 입술의 고백보다 좀더 발전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이같은 방법은 도덕적 회개에만 머물 수 있어 또 다시 미끄러지게 한다. 참다운 회개는 가던길에서 거꾸로 되 돌아서야 된다는 결단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던길을 돌어서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며 그 눈을 뒤로 돌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응시한채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또 미끄러짐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유학생들과 삶을 나누며 대화하다보면 미끄러짐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자주 듣는다. 코스타나 교회의 수련회등 여러 집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제부터는 바른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헌신하려 하였지만 삶에 현장에 되돌아 왔을때 바로 미끄러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좌절해하며 힘을 잃는다.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진채 거기서 그냥 멈출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의 힘은 넘어 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부딛히고 깨지며 살아갈때 우리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삶이다.나의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분명히 아는 것 하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빠를 세워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넘어 지는 나를 믿기 보다 나를 늘 세워 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의 세 아이들은 나의 거룩한 삶 혹은 거룩을 향한 삶을 보고도 살지만, 나같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사용하시고 세워 가시고 만져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변화해 간다.

과연 영적 미끄러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많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죄성으로 미끄러지고 깨어지는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과 싸우는 대처방법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새벽이슬과 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는 반드시 나누고 싶다.

첫채로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유학생활의 목표가 학위취득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룩함 추구를 그 우선순위로 놓아야 한다. 이제 구원을 받았기에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에 신앙의 선한 경주를 멈추고 땅에 주저 않아 쉬고 있어서는 안된다. 공부하며 순간 순간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 즉 코람데오의 삶을 살도록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과 늘 동행한 에녹처럼, 오늘날 유학생들은 성경에 한줄밖에 나오지 않은 평범한 신앙선배인 에녹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소망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학업의 우수성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나의 죄성을 심각히 자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자 하는 죄성이 있음을 의식해야한다.  이것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지 않으면 죄의 속임에 쉽게 미끄러져 버린다. 그러나 그같은 죄성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냥 미끄러져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삶임을 순간순간, 삶의 모든 상황속에서 인정하는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발전 시킨다. 따라서 캠퍼스에서든, 캠퍼스 밖에서이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깊숙히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를 젖은 눈으로 바라볼때 우리는 나의 죄악들과 세상에 관영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해 치를 떨며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만 멈추지 말고,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와 화목을 원하셨던, 그리고 그 화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며 큰 사랑에 감격해야 한다. 미끄러져 넘어져 있을때 우리가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그 사랑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 소름끼치는 미움이 없이 일어 선다면 또 미끄러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두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매일 매일 말씀묵상을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미끄러짐 없는 똑 바른 걸음을 걷기 위해 우리는 순간 순간, 매일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글을 마치며 우리들처럼 미끄러짐의 아픔을 경험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 1-2)

사진출처: http://farm4.static.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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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6:35

매 (Hawk)와 놀던 다람쥐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창문가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낮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스한 오후를 그렇게 보내다가 문득 나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창밖의 숲속에서 어떤 물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서 나의 눈이 자연스레 그리로 간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족에게 주신 집 거실의 창문은 아주 크다. 거실의 큰 창문 밖으로 내 시선을 끈 것은 매 한마리의 조용한 움직임이었고, 다람쥐의 장난스런 분주함 이었다. 매는 천천히 다람쥐 주위를 아주 가까이 돌며 다람쥐를 슬쩍 만지고 지나가는듯 했다. 처음에 왜 채어가지 않고 여러번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지 궁금했었다. 둘이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 매는 다람쥐를 원래 먹지 않는가? 다람쥐의 머리에 이상이 좀 생겨서 아무것도 모르고 저러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들이 놀던 자리 바로 아래는 조그만 개울같은곳이 있고, 그아래는 숨을 만한 구멍도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다람뒤도 도망할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노는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한참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와 둘째아이 혜민이를 불러서 함께 즐겼다.

광경이 하도 흥미로워서 iPhone으로 사진을 두어개 찍었다. iPhone에는 줌(Zoom)의 기능이 없어서 가깝게 상황을 포착하지 못했다. 찍고 나서 나중에 보았지만 사진에서는 분주히 뛰어 놀던 다람쥐를 찾아볼 수 없다. 숨바꼭질 하려고 나무 뒤에 숨었을까? 그러나 자세히 보니 매는 보였다. 아래 사진 빨간원에 보이는 조그만 물체가 바로 능청느럽게 다람뒤와 놀아주던 매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을 놀던 매는 천천히 천진스레 놀던 다람쥐를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해서 낚아 채어 유유히 숲속을 나오는것이었다. 그러더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아이 혜민이와 나는 잎을 벌린채 황당해 하며 말을 잊어 버렸다. 딸아이 왈: "아빠, 도와 줄걸 그랬어!"  나의 대답: "난 노는줄 알았지... 너무 불쌍하구나..."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적 메세지가 느껴졌다. 악한것과 놀면 절대 안되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도 안된다는것. 악한것은 처음부터 삼켜 먹지 않고 데리고 놀 수도 있다. 그것에 빠질때 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처음에는 죽을것 같이 무서워 가까이 가서는 안될것 같았지만 죽이지는 않는 그 실체를 신기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혹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를 모색하며 놀이에 푹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 즐거움이 되어 버린그땐 이미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은 옵션중 하나가 아닐지 모른다. 악한것이 본색을 드러내고 잡아쳐 갈때 그때 깨닫는다. "나는 도망쳤어야 되는데..." 그러나 너무 늦은것을 깨닫을 뿐 날카로운 발톱에 얽혀서 멸망을 기다리는 옵션만 남게 된다.

청년들이여. 유혹이 생기면 유혹과 놀려고 덤비지 말라. 처음에 놀아줄때는 별 문제 없을것 같게 느껴진다. 유혹이 오면 요셉이 그리하였던 그자리를 도망쳐 나와야 한다. 젋은 청년 요셉도 성에대하여 호기심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요염한 놀이의 유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냥 도망쳐 나왔다. 유혹의 자리에 머물면 안된다. 혹시 포르노에 탐닉해 있는가? 그것에 빠져있다면 지금 당장 도망쳐 나오라. 그것과 지금 놀면 그것에 먹힘 당한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그것으로인해 넘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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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9 17:44

기독유학생의 언어 사용

사무실에 도착하여 컴퓨터 열고 어느 교회 사이트 들어가 보니 저속한 내용이 게시판에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았었고 내가 첫번째였던것 같다. 이상한 것은 그곳에 적힌 언어들이 나의 허락없이 내 생각속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 버린것이었다. 일부내용들이 내 머리속에서 쉽게 지워 지지 않고 자꾸 생각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은혜 로운 것들을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분명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오늘 아침, 큐티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언어생활"이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1. 거짓과 헛된말 안한다 (엡4: 25) .

2.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 안한다 (엡5: 4).

3. 음행과 오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는다 (엡5: 3).

4. 더러운 말은 아예 입박에 내지 않는다 (엡4: 29).
 

5.
  만일 형제나 자매라고 일컫는 사람이 음행하는 자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이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자이거나, 술 취하는 자이거나, 약탈하는 자이거나 하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않는다 (고전 5: 11).

6. 대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말 하고" (엡4: 25).

7.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키치게" (엡4: 29) 하며

8. "감사하는 말을 하며" (엡5: 4)

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 (엡5: 19)한다.

9.
  불평대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한다. (벧전 4: 9)

10.
  친절한 말을 한다.  "악한 사람의 꾀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친절한 사람의 말은 정결한 제물처럼 받으신다." (잠 15: 26)

위에 것들을 잘 정리한 말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 4-7)

11.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이사야 40: 9)

내가 거하고 있는 캠퍼스에 바른 언어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 내자.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의사소통중 85%이상이 Non-verbal 이라고 한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의 표정과 몸짓,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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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9 17:15

단순함으로 승리하자

유학생활은 겉보기에 단순해 보일 수 있다.  수업 들어가고, 도서관 가고, 잠자러 아파트 찾아가고, 때가 되면 먹고, 바쁘면 그냥 굶고, 교회예배 및 성경공부 참석하고... 생활의 사이클은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역시 복잡한 세상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기에 늘 결정할것도 많고, 처리할일도, 생각할일도 너무 많다. 어떤이는 생활의 복잡한 스트레스로 카운셀러를 찾기도 하고 병원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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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단순해야 한다
. 단순하지 않으면 세상것에 묶여 버리게 된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단순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복잡하다. 그래서 늘상 피곤하다. 늘 바쁘게 변해가는 세상의 리듬에 살아야 하니까 참으로 정신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하늘에 두고 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할 수 밖에 없다. 어제와 오늘, 또 내일도 동일하신 그리스도와 리듬을 같이 하고 살기때문에 늘 평안하다. 따라서 단순한 이들은 밝고 명랑하다.

캠퍼스생활은 전쟁과도 같다. 단순함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복잡한 세상것에 묶여 버린다. 사단은 우리의 삶이 복잡해 지기 원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순간순간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이들은 집중을 잘 하기때문에 학업에도 승리한다. 단순한 이들은 글도 단순하게 쓴다. 따라서 그같은 글을 읽는 교수는 단순함의 심오한 깊이 때문에 그들의 글을 좋아하게 된다 (복잡한 글은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한 증거를 나타 낸다). 아무리 복잡한 글일 지라도 단순한 이들이 읽으면 논리가 단순해 진다. 그것을 남에게 설명할 때도 간단하게 할 줄 알게 된다.

단순한 이들과 함께 대화 나누면 너무도 마음이 편해 진다. 숲속의 잔잔한 호수를 대하는 것 같은 평안이 있다. 그러나 복잡한 이들을 대하면 정신이 없고 피곤해 진다. 머리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때가 있고, 뭔가 잡음만이 그 관계를 주장하게 된다.

심플하게 이번 한주를 보내자. 하나님의 자유를 체험할 것이다.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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