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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04 나는 성도이다
  2. 2009.07.24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2)
2015.04.04 12:32

나는 성도이다

미국이라는 이방 나라에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30년전에 미국에 왔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이를 셋이나 주셨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나와 같이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아간다. 며느리도 보았다. 그 아이는 백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의 얼굴로 백인 학교에서만 교수를 약 23년 하였고, 또 은퇴할 때 까지 교수를 하게 될 것이다. 


백인이 다수인 문화권속에 동양인의 얼굴로 살아가며 느끼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매우 중요하다. 모국에 있을때는 굳이 인종 중심의 정체감이 불필요 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였고 비슷한 얼굴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 색깔에 유난히 예민한 이 미국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겨나는 폭력과 차별이 매우 심각하다. 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더 약아진 것 일 뿐, 얼굴색깔과 관련된 인간의 죄는 이곳 미국에 항상 팽배해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세월이 갈수록 달라져 감을 느낀다. 전에는 유학생이는 정체감으로, 이후에는 대학교수라는 정체감이 가는 곳마다 붙어 다녔다. 그러나 교수라는 정체감은 일터와 공적장소에서만 사용될 뿐 가정과 교회에서는 달리 사용되어진다. 정체감에 따라 내가 나를 대하고 또 남이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짐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내게 가장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부담이 되는 정체감이 있다. 바로 성도이다. 은혜의 관점에서는 늘 감사하다. 내게 성도라는, 영어로 saint라는 정체감은 내가 내 업적이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붙여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라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라는 정체감은 나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 행동에 있어서 큰 부담감을 가져온다. 그 정체감으로 인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생각하는 방법과 내용도 아주 조심스럽다. 마음에 담아두는 잘못된 동기가 있으면 아주 괴로워 진다. 우리의 생각도 아시고, 우리의 행동도 보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깊숙한 동기를 아시는 그분께서 나를 성도라 부르시기에 정체감이 가져다주는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그래서 그 무게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늘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삽자가의 공로를 기억하지 않고, 나의 책임있는 행동과 생각, 마음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 간다면 나는 금방 번 아웃 (탈진)되고 만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 살아갔을 때 나를 먼저 찾으셨고, 나 대신 죄가 되심으로 돌아사시고 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내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음을 기억하면 힘이 난다. 그 은혜의 기억은 나의 생각, 행동과 마음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른 행위를 함으로 바른 태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성도라는 정체감이 너무 좋다. 특히 부활절을 앞두고 이 정체감이 나를 기쁨에 푹 잠기게 한다.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한다. 그러나 나를 성도가 되게 하시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게 험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큰 은혜가 나의 태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이해되어 지지 않는 역설적인 그 사랑이 너무도 크기에 내가 감동하게 되고, 아무런 대꾸함 없이 그 분의 큰 사랑아래 내 죄된 의지와 태도가 꺽여버리는 것이다. 나는 성도이다. 누가 무어래도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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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4 16:27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어릴땐 더 크고 싶었다. 나보다 좀 더 크다고 뽐내는 이들의 머리를 주어 박고 싶어 서였다. 좀더 커지니, 그것 보다 더 크고 싶었던 것이 나보다 더 큰 이들이 있어서 였다. 

1984년 겨울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어릴때 처럼 몸이 더 크고 싶어 서가 아니 였다. 사회적으로 크고 싶었고, 영향력의 힘을 키우고 싶어서 였다. 그래서 학교 선정할때도 내게 능력의 키를 더해 줄, 영향력의 힘을 더해 줄 그런 학교를 찾았다. 지도 교수도 그렇게 힘있고 능력의 키가 큰 자를 선택하려고 했다. 

대학 교수가 되어 서도 마찬가지 였다. 처음에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로 가게 되었다. 별로 알려 지지 않은곳이였다. 하바드 대학이나 MIT, UCLA, 예일 등 좋은 브랜드 네임의 학교가 아니여서 어느 학교 교수냐고 누가 물으면 플로리다의 조그만 주립대학이라고 말을 했다. 어느 후배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 이름을 물어서 알려 주자 "선배님, 그것은 서울에 있는 국제대학* 같은 학교 아니예요?" 라는 질문에 내가 있는 대학이 모국의 서울대, 연세대, 및 고려대학 같이 유명세가 없어서 "서울에만 국제 대학이 있냐? 플로리다에도 있다!"고 대답하며 내심 시큰둥 했다 (* 나는 국제대학의 가치를 폄하하는것이 아니고, 나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고백을 하는것이다). Ohio University에서 교수할때도 모국의 선.후배들이 학교 이름 물을때 마다 꼭 토를 다는것이 있었다. Ohio Stat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Ohio University는 어디에???? 더 크고,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학교에 있다는 것으로 나의 교수 직분을 그냥 그렇게 가격을 싸게 정해 버린것이다.

이후 인디애나 대학에 왔다. 내깐에는 더 이상 올라갈곳이 없다고 여기던 그런 학교였다. 그러나 그 대학 역시 모국에서 잘 알려진 대학이 아닌지라 나의 어머니 조차도 별 입맛이 없는듯 아들이 일하는 대학에 대해 더 알려 하지 않았다. 공대출신의 어느 친구는 Purdu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Indiana University라는 대학은 있는지 조차 몰랐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붙여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나를 저울질 하려 했다. 어디 까지가야 만족이 있을까? 얼마 만큼 더 올라 가야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있을까?

이제 칼빈 대학에 왔다. Calvin Klein이라는 브랜드는 알아도 Calvin College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학교로 보인다. 길에서 지나가다가도 학교 건물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학교이다. 우리어머니 표현을 잠시 빌려 표현해 보면 "학교도 작고 건물도 작아 보여서 손을 조금만 올리면 지붕을 만질 만한 조그만 학교"에 지금 와 있다.

그런데 달라 진게 있다. 전에는 더 크고, 더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 있는 대학을 동경하여 "상향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같은 가치를 화장실에 flush시켜 버린지라 남의 반응에 관심이 없어 졌다. 하나님 부르신곳에 내가 서 있으면 그곳이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그곳이 내게 제일 가치 있는 곳이다. 내가 더 올라 가려고 하기 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 보다 그리스도가 더 높아질 일이 무엇일까를 순간 순간 생각하며 바라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부르신이가 너무 크기에 그 분이 가라고 하는 그곳은 내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그런곳임을 안다. 그래서 그곳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귀한 곳임을 은혜로 알게 되었다.

전에는 속아서 나의 성취를 위해 목숨걸고 애썼다. 많은 노력을 통해 나를 크게 하려고 애썼고, 그럼에도 커 보이지 않아서 나보다 더 큰 대학의 이름을 나와 동일시 시킴으로 나의 성공을 표현해 보려 애쓰기도 했다. 내 분야에서도 나의 이름을 돋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명칭들을 추구 했다. 유명 학술지의 편집장, 연구소의 디렉터... 그같은 것으로 영향역의 범위가 큼을 표현하고 또 성공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달콤하게 즐겼던 것이다. 

내가 작아 지면 작아 질 수록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커지고 위대해 지는 그 비밀을 이제는 기쁘게 여기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낮은 지위로 일생을 보내신 후에 거기서도 더 낮은 곳인 골고다로 가셨고, 너무나도 잔인한 곳에서 누워서 돌아가시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세워지신채 돌아 가셨다. 전에는 내 입에서 얕은 입술로 부르짖던것을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아멘하며 받아 들이는 진리가 있다. 다음의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 5-8).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곳, 비단 그곳이 남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곳이라도,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지 않으려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더 높아 지는 삶을 산다면 그것 역시 매일 작아 지는 삶일 것이다. 칼빈대학은 내가 몸 담고 있기에도 과분한 곳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그리고 그분만이 높아 지도록 오늘도 더 작아 지고 싶다. 나의 섬김의 목적은 내가 작아 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섬김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가 작아 질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데 있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내 눈과 마음이 죄로 인해 이그러진 세상의 왜곡된 진리로 더 이상 속지 아니하고 매일 매일 더 작아 짐으로 그리스도가 삶속에서 더 커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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