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9.14 2009년 가을 학기를 시작하며...
  2. 2009.09.02 준석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6)
  3. 2009.08.01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4. 2008.12.08 가장 위대한 세가지
  5. 2008.10.16 칼빈대학에서의 강의
2009.09.14 13:49

2009년 가을 학기를 시작하며...

칼빈대학에서의 한해가 벌써 지나갔다. 이제 두번째 해로 접어 든다. 조그만 학교라 적응에 별다른 노력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크리스챤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깊숙히 깨닫는일,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과 학문을 통합시키는 과제는 나로 하여금 지난 한해를 아주 흥미롭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학교의 사명을 아멘으로 받아 들이며, 매번 수업 준비를 통해 신앙의 질문을 던지는 일은 결코 한가한 작업이 아니다. Postmodernism이 팽배한 이 시대에, 인본주의적 사고로를 성경을 통해 비판하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대안을 제안하려는 작업은 칼빈에서의 교수생활을 가장 흥분되게 한다. 그리고 이같은 고민을 하도록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학기 시작은 미국에서의 오랜 교수생활중 가장 힘들었다. 사랑하는 제자의 급작스런 천국으로의 떠남에 몹시 힙들었기 때문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개학을 준비없이 그냥 맞이한것 같다. 그래도 내게 힘을 주고 다시금 나를 부르신이의 사명을 깨닫게 한것은 매 학기초 행해지는 개강 예배 때문이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학교 체육관에 모여서 함께 예배 하는 것이다.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서로를 위한 축복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번 학기는 일어서기도 힘들었을것 같다. 

이번 예배의 특징은 거룩한 예배에로의 나아감도 있었지만, 교수가 학생을 향해 오른 손을 들고 축복해주고, 학생이 또한 오른 손을 들고 교수들을 축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교 말씀은 참으로 좋았다. 특히 크리스쳔 학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나를 상기 시켜준 귀한 말씀이 나를 세워줄 수 있었다. 학교 교목인 Mary Hulst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설교를 정리하였다:
"We don't only think that academically excellent and distinctively Christian can go together. We think they must go together. We are academically excellent because we are distinctively Christian. Our faith animates our scholarship. Our study stimulates our piety. All of you, along with all of us, will be in a community where being academically excellent and distinctively Christian isn't just a motto, but a way of life. Welcome, and welcome back, to Calvin College."
우리는 학문적 우수성과 훌륭한 그리스도인 삶은 병행되어 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만 하는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훌륭한 크리스쳔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문적으로 우수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학문에 활기를 더해 줍니다. 우리의 공부는 우리의 경건성을 촉진 합니다. 우리 모두와 더불어 학생 여러분들은 학문적으로 우수함과 훌륭한 크리스쳔의 삶이 하나의 좌우명에만 그치는 곳이 아닌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에 있게 될 것입니다. 환영 합니다. 칼빈대학에 온것을 환영합니다! 
맞다. 훌륭한 크리스쳔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위대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학문을 게을리 한다 라고 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날의 예배를 통해서 다시금 슬픈 마음, 낙담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느슨한 생각을 다시금 나의 부르신 사명에 꼭 묶어 버렸다. 이제는 힘차게 걸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정진할 때이다. 학생들을 다시 사랑하고, 그들의 발을 씻으며 제자로 만들어 가야하는 사명감에 다시 불타 올라야할 때이다. 앞을 보고 다시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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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2 21:36

준석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오늘 새벽 2시 30분 준석이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나도 몰래, 말없이... 늘 그러듯 "교수님, 먼저 갈께요!"라는 인사도 없이 떠났다. 괘씸한 녀석! 녀석이 나보다 먼저 천국 갔기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녀석이 어디 있어. 천국에서 만나면 혼내준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한없이 울었다. 천국서 만나면 허그 (Hug) 하기전 굴밤부터 한방 먹여줄거다. 이 버릇없는 준석이를 생각하다가 바로 정란자매에게 전화 했다. 어제도 오늘도 수없이 전화 했지만 첫번째 통화 되었을때는 함께 말없이 울기만 했다. "정란자매, 그냥 같이 울자!" 오열하듯 울어 대는 정란 자매와 전화 통화하면서 나는 길에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준석이가 너무 그리웠다. 옆에 손을 잡아 주지 못해 미안하였다. 

준석이를 만난 것이 벌써 2년도 넘었다. 한국에서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교수님의 아들과 함께 인디애나대학으로 유학 온다고 하여 사실 그 교수님 아들을 공항으로 라이드 갔다가 함께 동행하고 있던 준석이를 만난것이었다. 유난이 몸이 커 보였지먄, 인상이 아주 착한 곰 같이 생겼다. 팬더 곰 같이 귀엽기도 하였다. 두 학생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약 이틀 정도를 함께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차에 준석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자 거의 방어적으로 "내게는 복음 전할 생각초차도 마십시오!"라는 녀석의 허풍에 어깨 두드려 주며 "너는 곧 예수 믿게 될거야!"라고 되 받아 답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 보았고, 하다 못해 유학생 신분의 청화대경호실 출신의 공무원도 만나 복음을 전했지만 준석이처럼 딱딱한 마음으로 대하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준석이는 드물게 착했다. 공손하였다. 모든것이 깔끔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달리 태도를 취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준석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하여 교회도 나가고, 같은 교회의 어느 집사님과, 그리고 나의 미국인 친구 Darwin과 성경공부도 하며 이 아이는 그리스도인으로 되어져 가고 있었다. 보통 열심이 아니면 나가기 어려운 목요모임에도 나왔다. 앞에서 말씀을 전할때면 준석이의 눈에서 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만져가심을 자주 확인하곤 했다. 사무실에서나, 복도에서나, 혹 캠퍼스 어느곳에서 만나든 함께 이야기 할땐 준석이는 예외없이 운다. "준석아, 내가 너 때렸냐?"라고 물으면, "그냥 교수님보면 눈물 나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다. 

아내가 가게 할때 조그만 도움이 필요하여 부탁하면 두팔 걷어 올리고 굵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도왔던 준석이다. 가게를 띁어서 모든 가구와 기구들을 미시간에 가져 올때 돈을 주고 일을 시킨적 있다. 돈을 줄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 준석이를 고용하였다. 그냥 일을 부탁하면 돈을 안받으니까 고용해 버린것이다. 준석이는 무섭게 일한다. 남의 일도 자기일 같이 한다. 아내와 나, 그리고 나의 큰 아들 상민은 그냥 놀라기만 하였다. 정성껏, 몸을 아끼지 않고, 땀을 흘리며, 즐겁게, 그리고 정열을 가지고 일한다. 

공부도 그렇게 정열적으로 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도서관을 드나 들며 공부하는 성실한 학도였다. 그러나 준석이는 자신의 이기적 성공만을 추구하려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학도가 아니였다. 내 눈에 보인 준석이는 아주 진지한 크리스쳔 학도 였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준석이의 고민은 자신의 학문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였다. 미시건에 있는 내게 여러번 전화도 하였고, 또 집으로 방문하여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으며 준석이는 크리스쳔 학도의 진지한 면모를 내게 보여주었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 9월 14일 준석이가 내게 보낸 미멜중 하나이다. 
... 앞부분 생략...  대학에서도 관광개발을 전공하였고 이곳 인디애나에서도 역시 Toruism Management 공부하고 있습니다만학업의 관심분야를 이제서야 조금씩 찾아가는듯 합니다관광이라는것이 관광객과 관광자원그리고  둘을 연결해 주는 제반 모든 요소들을 다루고 있지만저의 관심분야는관광자원입니다자원의 경제적문화적사회적 임펙트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그러다 보니자연스레 지속가능한 관광 (sustainable tourism), 대안관광(eco-tourism, green tourism, rural tourism...), 자원의 경제적 가치   문화적사회적 영향 평가관광객의 태도  그에 따른 관광지의 선택자원해설(interpretation) 영향 등이 주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코스타를 전후로 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시 말해 기독교인으로서 저의 학업의 목적과 여정을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기전에는 미국에서의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좋은 학자가 되는 것이 그저 저의 목적이었는데요, 지금은 제가 살아서 숨쉬는 것도, 또한 이곳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신 학업의 기회이기에 설사 제가 박사 진학에 다시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저 저의 부족함을 돌아볼 개인적인 자조나 타인에 대한 원망은 없기를 소망합니다.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혹시라도 박사과정에 진학한다면 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크리스챤 Scholar로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있는 학문을 하고싶습니다. 요새 Leisure and Aging이란 과목을 들으며 한국인 이민 노인들의 여가 만족도와 social support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요예전에는 전혀 관심밖이었 leisure recreation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minority, ethnicity, and nationality, 사회적 약자 (노인, 장애인, 경제적 소외계층 )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도전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솔직히 제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관심분야들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관광자원분야와 행복, 다소 쌩뚱맞은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소그룹에서 뵙게된 노령의 권사님 내외분을 보면서 점점 제가 해야 공부가,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집니다. 어떻게 주제의 페이퍼을 쓰면서, 이러한 생각 중에 권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경제학을 위시한 모든 학문이 어떻게 파이를 크게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하는가에 촛점을 맞춘, 오로지 일만을 생각하는 음울한(dismal) 학문이라면, 관광학이라는 학문은 일이 아닌 여가에 바탕을 두고 어떻게 사람들을 놀게, 쉬게 만들어 있는가를 연구하는 행복한 학문이라고 합니다..굳이 leisure recreation 아니더라도, 제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관광이라는 학문과 지식을 통하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있지 않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만 정작 배운 지식이란 것이 너무도 얇아 깊은 생각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관광을 통해서 사람들을 성장, 성숙시키고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있지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만 도달했을 뿐입니다평생의 연구주제를 행복으로 삼고자하는 석사생을 과연 어느 누가 받아 줄지 불안함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행복한 확신도 오래간만인듯 합니다..^^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 뒷부분 생략...
그뒤 준석이의 생각은 많이 발전하여 크리스쳔 학도로 박사과정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막연하나마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듣는 나로서도 그 그림이 많은 생각, 고민 및 기도가 있었음을 눈치챌만치 잘 그려져 가고 있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성공보다 자신의 공부로 이 세상을 섬기고 싶은 그의 뜨거움을 대화때마다 감지 할 수 있었다. 

석사학위를 마쳐가면서 박사과정 진학에 어려움이 정말 많았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박사과정을 추진하는 준석이를 위해 쓴 추천서가 제법 된다. 낙방의 소식이 계속적으로 날라왔지만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기다렸다. 그리고 돈이 없어 박사과정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버틸까 심각히 고민되어 장학금을 위해 또한 함께 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미시간에 와 있었기에 우리들은 의례히 전화로 기도 하곤 했다.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드디어 Texas A & M (준석이가 하던 전공 분야에서는 제일 좋은 프로그램이 있는 대학)으로 부터 입학허가서가 왔다고 전화를 받았다. 함께 기뻐하며 전화로 아우성치며 축하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후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말을 하여 함께 "할렐루야"를 외치며 기뻐하였다.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준석이가 바로 엇그제 같다. 

텍사스로 이사 가기전 코스타에도 참석하여 많은 코스탄들 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진솔하게 한적이 있었다. 간증이 있기 하루 전날 저녁, 집회가 있던 휘튼대학의 Alumni Gym에서 함께 손을 붙들고 기도 하였다. "하나님, 준석이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간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라고.. 많은 간증들이 혹 하나님 보다 자신을 높이는 자기자랑이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였다. 다음날 준석이는 강단에 섰고,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채 하나님을 높이는 간증을 하였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 냈다. 얼마나 감사하였던지. 그리고 준석이의 간증은 많은 코스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이토록 준석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용감하다. 그리고 하나님 믿은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하나님 높이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래서 그 간증을 들으며 녀석 보다 내가 먼저 울었고 기뻤다. 왜냐하면, 나는 준석이가 유별나게 선하고 좋은 아이라서 하나님을 그렇게 높인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어려움 뒤에 늘 함께 계셨던 하나님, 그리스도를 주저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준석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토록 높이는 것임을 가까이 있었던 나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본인이 가고 싶었던 대학으로 얼마되지 않은 짐을 싫은 트럭을 몰고 가며 전화 하였다. "교수님, 저 지금 칼리지 스테이션을 향해 가고 있어요! 가면 또 전화 할께요!"라고 말하던 준석이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 그제 같다. 떠나면서도 자신의 아픔 보다 내 관절염의 아픔을 더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던 준석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건강보험이 없어서 머리가 아픈데도 꾹 참고 보험 살때 까지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험이 시작되는 그제 병원에를 찾아 갔었고, 준석이는 그 다음날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나 흐르는 피를 막을 수 없었던 의사는 절망을 선언하였고, 가족들이 산소호흡기를 뺄것을 제안하였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준석이는 새벽 2시 반에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준석이가 주님의 곁으로 가기전 늦은밤까지 기도 하면서 우리들이 나누었던 지난날의 많은 대화들을 기억하였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 울먹거리며 나의 건강을 묻던 그 입술, 웃을때는 유난히 밝았던 눈가의 눈 웃음... 그리고 준석이가 전에 내게 보냈던 이멜도 다시 열어 보며 형제를 그리워해 보았다. 
교수님!  참 보고 싶습니다... 잘지내시는지...안부를 묻는 인사보다 보고싶다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되네요...^^ ... 준형이 형을 통해서 교수님 가정의 평안함을 들으면서 제가 왜그리 기쁜던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성정에 앞으로 얼마나 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실지 짐작은 합니다만, 건강 유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교수님을 뵈면 주책없이 눈물을 훔치고는 했는데요,,, 요새는 교수님 생각에 짠~~ 하고는 합니다... 같이 기도해 주시던 교수님 손이 참 따뜻했었는데요.. 
텍사스 갈때처럼 "교수님, 나 지금 천국 가요! 가서 전화 할께요!"라고 하면 안되었나? 나쁜 녀석! 네 손을 잡고 밤새 기도 하고 싶구나. 너를 이땅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너무 크지만, 너를 그 누구 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께서 계신 그곳에 갔으니 오히려 네가 부럽다. 준석아, 돌아 보니까 네게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진것 같구나. 준석아, 네게 사랑의 빛을 진 많은 이들가운데 회개의 운동이 일어 나고 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함이다. 네가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갔던것을 알지 못했던 나였고, 또 이웃이었기에 과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는가를 되묻게 되는구나. 네 아픔을 감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다오. 뿐만 아니다. 우리들은 영혼구원을 뒷전에 쳐박아 둔것을 통회하며 무릎꿇고 있다. 네 삶이 구원의 기쁨으로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산 삶이 었기게 우리에게 더욱 큰 도전이었다. 우리들이 더 영혼을 사랑하며 너 처럼 구원의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도록 우리들이 주안에서 애를 쓰마. 준석아, 잘 가거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See you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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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21:25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누구를 만나면 흔히 받는 질문이 직업에 관한 것이다. 어떤일에 종사하냐는 질문에 나는 흔히 대학 교수라고 짦게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대학교수라는 대답과 함께 금방 되돌아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역시 주저치 않고 "치료 레크리에이션" 혹은 "레크리에이션 치료"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나의 대답은 적어도 이랬다. 그리고 그같은 대답은 나의 삶의 상태를 정확히 반영 하고 있었다. 나를 나로 정의 지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전문 분야와 그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라는것으로 나를 철저히 국한 시켰던 것이다. 내가 예배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하는 귀한 사명은 교회나 성경공부에서나 고백해야하는 그런 악세사리로 여긴것이다. 

누구든 이제 내게 전공을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나의 대답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은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예배 입니다!" 예배라는 새로운 전공이 내 삶에 따라 붙으면서 사실상 요즘 전공에 못지 않게 예배를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실천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전공 과목을 파헤치고 연구할때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예배에 대한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학문에 임하게 된다. 글을 쓸때도 그렇고 강의실에서 강의 할때, 학생들과 상담할때에도, 교수회의 에서도, 학술지 논문심사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께 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흠뿍 받는 일이다. 이같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고 가는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예배는 기쁨과 감동이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나의 죄와 이땅에 만연한 죄의 흔적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회개도 한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나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만큼 나를 더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해질 수록 내가 공부 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진다.

또 다른 나의 전공이 예배 인지라 나는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관련된 제반 활동영역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로서 대충 강의 준비를 하고 들어 갈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레크리에이션 치료에 관한 글을 쓸때 대충 끄적거려 낼 수 없고, 남의 생각을 이리 저리 조각지어 살짝 새롭게 하는 치졸한 글을 쓸 수도 없다. 학생들 상담 하고 만날때도, 전화 받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높아 지려고 강의 할 수도 없고, 내 이름 높이려고 글을 쓰려고 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인간 중심의 사로로 만들어진 지식체계안에서 죄의 흔적들을 들추어 내고 이를 하나님중심의 사고로 다시 비판하고 묵상하려 애쓰게 된다.

그래서인지 삶 자체가 너무 재미 있다. 교수생활에 신명이 난다는 말이다. 전문직의 삶이 예배임에 그곳에는 은혜가 넘친다. 은혜란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바, 공부를 하면서, 전공분야로 세상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찰과 지혜가 그때 그때 주어져 흥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것이 쉽지는 않다. 많은 싸움이 있다. 예배의 태도를 잃고, 예배의 대상이 세상 혹은 내가 될때도 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늘 동반하는 치열한 싸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삶의 전환을 매우 감사히 여긴다. 노파심에 한가지 더 설명해야할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예배라는 전공은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칭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예배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예배의 삶을 사는 우수한 예배자로 살고 싶고, 영원한 예배가 있을 천국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연습하며 더 누리며 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가 학문 분야 보다 앞선 주 전공이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 하시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의 전공의 분야를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도구로 쓰라고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것이 예배의 뒤에 물러 서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 둘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되야 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나이듯), 다시 말해 통합되어져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루어 내는 가장 근본이 바로 이원론의 삶 (삶과 예배, 전공과 예배)을 떠나, 신앙과 전공이 (또 신앙과 매일의 삶이) 일원화 되는 삶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학문과 삶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영위되어 지는것 이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공과 예배가, 삶과 예배가, 주일과 주중의 삶,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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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00:07

가장 위대한 세가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식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가장 위대한 발견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 Arnold H Glasow

나는 칼빈대학에서 이것을 추구하고 싶다. 계속 좋은 학술지에 글은 게제할 것이다. 계속 책은 쓸것이다. 계속 강의는 할것이다. 그러나 나의 가치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뜻을 아는것, 그것을 일생의 삶속에서 적용하며 실행하는 것이다.

전에는 내 이력서에 몇개의 논문을 얼마나 좋은 학술지에 게제하였는지가 내게 중요했다. 그것으로 학자의 삶을 평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의 이력서는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것으로 삼지 않겠다. 이제는 예수님 앞에 섰을때 그분께 보여줄 삶의 이력서를 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칼빈에 온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 바필드 Sun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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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6 15:59

칼빈대학에서의 강의

전에 있던 대학에서도 강의하는것이 참으로 재미있었지만, 칼빈대학에서의 강의는 참 신난다. 학부학생만 가르치지만 학생수가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전공 분야 과목에는 7명의 학생이 있고, 여가철학 강좌에는 14명의 학생이 있다. 학부생이지만 꼭 대학원 수업같이 많은 토론을 한다. 학생들의 생각을 들어서도 재미 있지만, 그들을 깊숙히 알아가서 더 재미 있다.



"재미" 혹은 "신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같은 경험은 강의 중에 주로 있고, 강의를 마친뒤는 큰 보람을 느낀다.  전에 있던 대학에서 못 느끼던 것이다. 즐거움 + 만족 + 소명 + 감사 들이 혼합된 그런 감정이다. 언어가 감정을 따르지 못해 안타까우리 만치 칼빈대학에서의 강의는 너무 좋다.

어떨때 내가 강의 하는지, 혹은 설교를 하고 있는지 착각될때도 있다.  칼빈대학은 학문과 신앙의 통합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창출해 내기를 권유한다. 나를 신나게 하는것은 바로 이같은 학교의 기대감 때문이다. 강의 준비는 꼭 성경공부 같이 느껴지고, 강의는 설교 같이 느껴지는 이 기쁨이란... 

어떤이들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립대학에서 그같은 것들을 나눌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나에게는 너무 신나는 일이다. 지금 생겨나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 큰 호수가에 던져진 조그만 돌이 만들어내는 물결같이 미약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통합의 강도가 센것과 약한것이 중요한것이 아니고 이같은 통합을 시도하기 위해 해야하는 충분한 묵상과 기도가 나를 늘 하나님께 주목 시키기 때문이다. 이같은 통합을 위해 자건거를 타고 학교를 오가며, 걸으며, 쉬며, 음악들으며 계속 묵상을 하게 된다. 

죄가 관영하는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지식체계를 성경의 진리로 조명하는 일은 중요하다. 잘못된 지식체계를 성경의 진리로 분별하는 일 뿐 아니라, 잘못된것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탐색해 보는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다행이 나의 분야는 통합이 다소 쉬운편이다. 장애, 치료, 행복, 성장, 인간관계, 상처 등등의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 수학, 통계 등 그 통합이 어려운 분야도 있다. 그러나 그 분야를 가르치는 이곳 칼빈대학 동료교수들의 노고와 그 결과들을 보면 놀라웁다.

여가철학 강의는 예배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수업이 아침 8시35분이 있기 때문이다. 일어나자 마자 아침도 거르고 달려온 학생들과 함께 그때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이들은 어쩌면 하루 종일 방황 할 수도 있기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서로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자고 했다. 인도자는 수업 10분전에 와서 찬송가나 가스펠송을 틀어 놓고 모두를 위해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한다 (한 학생이 사미먼과 가펑클의 노래를 튼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학생 모두가 (거의 4학년생) 예배인도를 아주 잘 한다는 것이다. 그 지체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쁜지 모른다. 

모든게 신나고 좋지만 힘든 부분도 있다. 내가 준비한 부분만 강의를 하면 쉽지만,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실일을 남겨두는 작업이다. 내가 조정하면 만사가 쉽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부분을 기대하며 맡기는 부분은 사실 긴장이 된다. 미리 그날의 강의내용을 철저히 알고 강의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떨때 생각치도 않던 것들이 내 생각에서 뛰쳐 나오고, 내 입으로 토해낼때 비로서 알게되는 안타까움이 있다. 분명 그렇게 하나님께 배운 학문과 신앙의 충돌은 너무 귀한 가르침 이라 적어두려고 애쓰고 있다.  

내것으로 꽉 채우고, 그것을 내가 끝까지 주장하게 되면 내가 만족하는 방식으로만 마쳐진다 (그렇게 마쳐졌을때도 사실 제법 많았다). 그러나 알찬 인사트 (통찰)는 얻지 못한다. 이렇게 설명하자니까 좀 신비주의적으로 들려질까봐 사실 나눔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 그분께 철저히 맡겼을때 그분께서 하시는 부분은 감추고 싶지 않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일것이다. 우리의 삶을 신앙과의 통합하여 살아가면 어떨까?  삶의 많은 부분과 영역에서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바라며 살아간다면 최소한 그부분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아닐까? 그러나 그분의 도구로 이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힘차게 바라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자세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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