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4.12 존 워너메이커
  2. 2010.04.06 John과의 만남
  3. 2009.01.12 시간을 보는 시각
  4. 2008.11.13 자신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Part II
2010.04.12 11:43

존 워너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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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 "주일에도 백화점 문을 열어서 매상을 높여야 합니다"
존: '나는 하나님의 날을 세상의 재물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해리슨 대통령 (23대): "존, 당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체신부 장관을 맏아주시오"
존: '만약 장관직을 수행하는 일 때문에 주일성수와 교사 일을 못한다면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신문기자: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 보다 못합니까?"
존: "장관직은 몇 년 하다 그만둘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동안 해야 할 나의 본업입니다.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 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봉사하는 일은 나의 최고의 기쁨이자 나의 특권 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존 워너메이커!
그는 어떤일이 있어도 주일예배와 봉사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의 날을 주님께 온전히 드렸던 삶을 돌아보며
주일성수의 가치와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너무나도 바쁘고 일이 많은 이시대의 크리스챤들의
마음속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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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6 17:48

John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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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가명칼빈대학 학생이다칼빈대학에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어서 학교에서 나에게 학생하나를 멘토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여 최소한 한해 한명은 기도하면서 성실히 섬길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고 허락하여 만난 학생이 John이다나와 John은 격주에 한번씩 만난다보통 두시간어떨땐 조금 넘을때도 있고 또 모자랄때도 있지만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지난 가을 학기 부터 시작하여 이번 봄 학기 까지 꾸준히 만났다만남 초기의 대화는 삶의 문제를 꺼내 놓고 그 해결을 위한 상담이었다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이다주로 만남이 있기전 우리의 만남 앞두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또 우리의 만남을 의탁드린다.이렇게 우리들은 만난다.

John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나는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그냥 기도하고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좀 세련된 방법은 아니고좀 무식해 보일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이같은 접근을 아주 좋아한다그동안 여러 학생들과 교제하고 상담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귀한 통찰이 하나 있었다엄청나게 멋있게 들려지는 그런 통찰이 아니고 이미 성경에 수없이 많이 제시된 보편적이며 단순한 진리이다,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남혹은 하나님 보다 나와 사람을 더 의지함에 있다는 것그러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돌아감 혹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함에 기인한다는 성경적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기도하며 John을 만났다. John은 교회도 다니고 있었고또 칼빈대학 같은 크리스쳔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하나님을 잠시 떠난 상태이거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그러나 우리들의 두번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John의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도와 주셨다즉 기도중 그같은 의심이 생겨 났고구원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한다는 강열한 생각이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우리의 대화는 복음제시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 John은 좀 놀라는듯 했지만, 자신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매우 솔직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내게 분명히 대답하는 매사 분명한 아이였다. 나는 대화식으로 구약과 신약을 이야기 하며 교제 하였다그렇게 몇번을 만나다가학기말 시험이후 John과 그의 여자친구를 함께 우리집으로 점심 초대 하였다. John의 신앙상태를 알기 시작하면서또 집으로 초대해 놓고 나와 우리 가족은 매일 저녁 John의 구원문제를 위해 기도하였다. John에게 나의 가족도 소개하고또 점심을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 하다가 기회를 내어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제시하였다놀랍게도 John은 여자친구가 지켜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그날 처음 만났던 John의 여자친구였지만그녀는 내게 이 순간을 위해 제법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주었다그래서 나도 이 순간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끈질기게 기도하였다고 귀뜸해 주었다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함께 고백하며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된 이후 봄학기에 가진 우리의 첫 만남에서 John은 삶의 여러 문제를 더 이상 가져 오지 않고 신앙성숙과 관련된 질문들을 하였다어떤 질문에는 스스로가 묻고 대답하기도 하는데 그 대답들은 John의 신앙 고백으로 들려 졌다전에 나누었던 삶의 혼돈 및 장래에 일어날 염려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의 대화에 조금도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결국 예수님 없는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예수님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임을 다시 실감한 복음전도 였고또 멘토링이였던 것이다.

크리스쳔 교수의 참 맛은 학생이 좋은 직장으로 좋은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어서가 아니다또 한학기를 잘 가르쳤다고 학생들이 감사로 스타벅스 카드나 책을  선물로 가져다 주어서도 아니다학기말에 주로 행해지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아서 또한 아니다크리스쳔 교수로서 가장 신나는 일은 강의실과 강의실 밖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게되는 일이다영원이라는 차원의 엄청난 사역을 보잘것 없는 나에게 맡긴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 하시다.나는 그같은 하나님이 너무 좋아 오늘도 혹 내게 맡기신 영혼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게 된다할렐루야! 

그림출처: 
www.hebronb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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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0:05

시간을 보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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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 부터 지금까지 시간이라는 주제는 많은이들로 부터 뜨거운 관심을 가져 왔다. 시간과 관련된 주제로 출판된 수없이 많은 책들과 논문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산업혁명이후부터 계속적으로 효율성, 생산성 및 속도에 대한 개념과 그 틀을 같이 하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많이, 더 빨리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은 한 인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고 성공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한다. 누구누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했다더라. 그런데 누구 누구는 9년이 지나도 마치지 못하고 있다. 분명 3년내에 마친 박사는 능력이 있는자이며 성공한 자로 얼른 구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9년동안 학위가 마쳐지지 않은 학생은 무능한자로 보여질 수 있다. 사실 게을음으나 자포자기로 미루어지는 공부가 있기도 하다. 주변을 바라 보았을때 늦게 마친자가 빨리 마친자보다 더 탄탄한 지식체계를 쌓아가고 또 자신의 학문분야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를 자주 보았다.

개인을 떠나 집단의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개척한지 2년 밖에 안되었는데 교인수가 벌써 1만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어느 어느 교회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교인수가 약 500여명 밖에 안된다. 2년에 1만명 가진 교회는 분명 성공한 교회이고 많은 교회가 닮아 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것이다. 반면 10년간 500명의 교인을 갖춘 교회는 얼핏 다른 교회가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칭찬 받고 책망 받는 교회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계시록에서 칭찬 받은 교회는 그 크기와 빠른 성장 때문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뭏든 시간에대한 관점은 어떤 잣대 (Yard Stick)을 가지고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많이 살면 70-80년 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속도와 생산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살아서 숨쉬는 제한된 시간내에 더 많은것 보아야 하고, 해야하고, 경험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며, 또 맛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자기몰입적인 달음질을 하는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허무를 위한 달음질"이 될 수 있다. "조금 더"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루었지만, 나 보다 조금 더 이룬 삶 앞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 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가 영원이라는 차원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시간의 속도와 생산량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중생한 (born-again)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나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가, 방향과 관계없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보다 더 중요 하다. 그리고 불필요한것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How much and how fast)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 (What)을 "어떻게" (How)  생산하는냐를 더 중요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한 확장보다, 천국의 확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천국확장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한다. 이들은 또한 자신을 평가해줄 절대평가자가 누군지를 확실히 안다. 현세에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찬사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의 평가에 더 관심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Formular를 제안해 본다: 

      1. 삶 = 생산량 (업적) ÷ 속도 (속도가 빠를 수록 삶의 숫자가 많고 그것이 삶을 결정한다)
      2. 삶 = 방향 x 믿음 (삶의 올바른 방향과 믿음의 충돌이 삶을 결정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공식은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두가지 공식을 놓고 생각해볼 일이다. 첫번째 공식으로 살때 나의 삶과, 가정, 이웃은 어떤 모습일까?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돈 벌어 더 많이 빨리 쓰고, 더 빨리 인생을 마칠것인가? 더 빨리 인생을 마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같은 삶이 사회에 기여하는것은 무엇일까? 더 많은 그리고 빠른 생산을 통해 더 빠른 그리고 많은 소비를 조장하지 않는가?

가야할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걷는자에게는 샬롬의 삶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을 망하리로다" (시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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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21:21

자신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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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겸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아야 자신감 추구 보다 겸손을 더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겸손에대해서는 이미 앤드류 머레이가 쓴 "겸손"이라는 소책자도 있어 사실상 그 책을 읽는것이 매우 도움이 될것이다. 따라서 이 브로그에서는 그곳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거나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소책자를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겸손은 먼저 자기중심적 태도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정직한 태도이다. 과학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할 자세가 될 수 있다. 겸손한자는 공부할때 내가 어떤 주제를 남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에 겸손한자는 "그 주제의 실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다던가, 토론에 참여해 보면 겸손한자와 그렇지 않은자가 쉽게 구별된다. 겸손한자는 다루고 있는 어떤 주제를 자기가 발견하고 생각한 만큼 솔직히 다루려 한다. 더 적게 아는것 같은 비굴함을 취하지 않는다. 또 그랬다고 남보다 너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으로 부터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오게 되면 방어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반가워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것을 깊숙히 생각하려 한다. 아는만큼, 또 생각이 미치는 만큼만 대답한다. 그리고 청중의 생각을 물어 본다.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오만한자 (자신 만만한자)는 방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땅한 대답이 없으면 당황해 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얼버무리다가 더 많은 질문을 받고는 오히려 자신의 짦은 생각이 들통나버리기도 한다.

강의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좋은 질문하게 될때, 그러나 그 마땅한 대답이 없는 겸손한 교수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함께 토론하려 한다. 그러나 오만한 교수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런적이 제법 있었다).

겸손한 학생/학자는 사실에, 현상에, 주제의 이해/파악에 더욱 큰 관심을 둔다. 그리고 다른이들과 함께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를 갖는다. 그들은 오히려 정직하다. 학생으로서, 학자로서의 바른태도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논문발표나 토론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접근하려는 그의 태도를 주위 동료들은 오히려 존중해주며 더 신뢰해준다. 겸손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것 이외에 진정한 겸손은 누구의 시선을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즉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한 새벽이슬같은 주의 군사들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모든일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동기를 취하지 않고 매사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살아간다. 그는 사람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는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날카롭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 가며, 그같은 시선으로 인해 안정감을 갖는다. 왜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은 그 눈을 내게서 다른데로 돌리시지 않을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은 겸손한 삶이라고 말하고 이렇게 살아가는자를 겸손한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다.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끊임 없이 바뀌는 기대와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혼돈이라는 가마솥에 빠져 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런 생각과 감정, 상황에 따라 바뀌는 그같은 변화무쌍한 눈을 어찌 기쁘게 해줄 수 있단말인가? 소위 자신감 있는 자들은 이같은 상황속에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수 있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또 이같은 변화무쌍을 제법 담대하게 대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들을 놓고 우리는 자신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신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정말 자신은 믿을만한 대상인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을때가 너무 많다. 내 작심 삼일을 연약한 속성을 어떻게 믿는가? 상황이 불리하면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는 이 마음을 가진 나를 어덯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물체가 내게 큰 충격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것 같은 내 연약한 몸을 신뢰하기 어렵다. 철인이었던 뉴욕 젯트 미식축구 선수였던 데니스 버드가 경기중 다른팀원과 강하게 부딛혀 그의 몸이 공중에 날았고, 땅에 몸이 잘못 닿아서 사지를 사용못하는 척수장애자가 되었다. 수백 파운드의 무게를 들던 그가 몇그램의 무게를 들 수 도 없는 사람으로 변했을때 그는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선언해 버렸던것을 알고 있는가?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믿으면 믿을 수록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믿으면 믿을 수록 더욱 믿음이 자라는 것이 하나님이다. 사람은 (부모일지라도) 실망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이같은 믿음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해본이들은 벼랑끝에 서있을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갖게 된다. 이같은 믿음을 가진이는 99번의 실패를 해도 절망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것을 믿는 믿음으로 또 시도할 용기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신감으로 살 수 없다. 또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된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믿음이 내게 힘을 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담력이 생기는 것이다. 골리앗 앞에선 어린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 45) 라고 외친것은 철이없어 입으로 내 뱉은 객기가 결코 아니다. 또 12명중 절대 다수였던 10명의 가나안땅 정탐꾼들이 모세에게 보고 하기를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민 13: 33)라고 말할때 갈렙은 무엇이라 하였나? 그는 옷을 찟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 9). 갈렙이 자신을 신뢰하였던가? 그의 고백속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땅을 정복해야할 사명을 가진 우리들은 그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겸손한 자세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형제님, 자신감 가지려 애쓰지 마시고, 겸손하려 애써 보세요!"라는 답은 형제의 기대에는 잠시 벗어 났는지는 모르지만 (안그랬을것이라 추측한다), 하나님의 기대에는 벗어난것 같지 않다.

*사진은 Google Image Search (http://images.google.com/)에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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