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04.04 나는 성도이다
  2. 2009.06.10 굿 바이, 채점회피 증후군!
  3. 2008.12.14 교수의 진정한 기쁨
  4. 2008.04.20 인디애나대학에서
2015.04.04 12:32

나는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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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이방 나라에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30년전에 미국에 왔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이를 셋이나 주셨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나와 같이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아간다. 며느리도 보았다. 그 아이는 백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의 얼굴로 백인 학교에서만 교수를 약 23년 하였고, 또 은퇴할 때 까지 교수를 하게 될 것이다. 


백인이 다수인 문화권속에 동양인의 얼굴로 살아가며 느끼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매우 중요하다. 모국에 있을때는 굳이 인종 중심의 정체감이 불필요 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였고 비슷한 얼굴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 색깔에 유난히 예민한 이 미국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겨나는 폭력과 차별이 매우 심각하다. 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더 약아진 것 일 뿐, 얼굴색깔과 관련된 인간의 죄는 이곳 미국에 항상 팽배해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세월이 갈수록 달라져 감을 느낀다. 전에는 유학생이는 정체감으로, 이후에는 대학교수라는 정체감이 가는 곳마다 붙어 다녔다. 그러나 교수라는 정체감은 일터와 공적장소에서만 사용될 뿐 가정과 교회에서는 달리 사용되어진다. 정체감에 따라 내가 나를 대하고 또 남이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짐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내게 가장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부담이 되는 정체감이 있다. 바로 성도이다. 은혜의 관점에서는 늘 감사하다. 내게 성도라는, 영어로 saint라는 정체감은 내가 내 업적이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붙여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라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라는 정체감은 나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 행동에 있어서 큰 부담감을 가져온다. 그 정체감으로 인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생각하는 방법과 내용도 아주 조심스럽다. 마음에 담아두는 잘못된 동기가 있으면 아주 괴로워 진다. 우리의 생각도 아시고, 우리의 행동도 보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깊숙한 동기를 아시는 그분께서 나를 성도라 부르시기에 정체감이 가져다주는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그래서 그 무게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늘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삽자가의 공로를 기억하지 않고, 나의 책임있는 행동과 생각, 마음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 간다면 나는 금방 번 아웃 (탈진)되고 만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 살아갔을 때 나를 먼저 찾으셨고, 나 대신 죄가 되심으로 돌아사시고 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내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음을 기억하면 힘이 난다. 그 은혜의 기억은 나의 생각, 행동과 마음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른 행위를 함으로 바른 태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성도라는 정체감이 너무 좋다. 특히 부활절을 앞두고 이 정체감이 나를 기쁨에 푹 잠기게 한다.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한다. 그러나 나를 성도가 되게 하시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게 험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큰 은혜가 나의 태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이해되어 지지 않는 역설적인 그 사랑이 너무도 크기에 내가 감동하게 되고, 아무런 대꾸함 없이 그 분의 큰 사랑아래 내 죄된 의지와 태도가 꺽여버리는 것이다. 나는 성도이다. 누가 무어래도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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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14:25

굿 바이, 채점회피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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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를 하면서 제일 신나는 일은 긴 여름 방학을 맞이하는 것이다. 학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더 신나는것은 강의이다. 매번 강의를 기쁨과 긴장으로 준비한다. 박사과정부터 미국학생들 가르쳤으니 약 23년정도 강의한 셈인데, 아직도 긴장감이 돈다. 나쁜 긴장감이 아니라 설레이는 마음과 새로운 대화를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긴장이다. 강의는 정말 재미있고 의미 있다.

그러나 교수를 하면서 제일 싫은 일이 있다면 채점하는 일이다. 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표현한적 있지만 나는 채점을 유별나게 싫어 한다. 인디애나에 있던 동료 교수는 "조그만 방에 채점거리를 많이 가져다 놓고 채점하게 하는 곳"을 지옥으로 표현하기도 해서 웃은적이 있다. 

나는 분명 채점회피 증후군 (내가 자가진단으로 만들어 낸 병명)의 환자 였던것 같다. 채점거리가 많은 사무실에는 들어 오기가 싫어서 사무실 주변을 빙빙 돈다. 한참만에 용기내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채점중에는 입맛도 없고, 잠도 편치 못하다. 그때 마시는 커피는 좀 쓰게 느껴지고, 그때 듣는 음악은 소음일때가 많다. 신경도 예민해 지고, 스트레스로 힘들어 한다. 이 블로그를 읽고 있는 지체중 이같은 증세를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채점회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얼마전 그 증후군을 치료를 받았다. 고질병인줄 알고 괴로워 했는데 그것은 완치가 가능한 병이라 이제는 여겨 진다.

치료법은 은혜이다. 그 증후군으로 괴로워 하던 지난 학기말중 나는 기도하다가 나는 나의 그같은 고질병에대해 회개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왜 너는 그런 나쁜 태도로 임하느냐라는 내적 음성이었다. 혹 채점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할 수 없냐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무엇에 얻어 맞은양 멍하게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아무런 질문과 사고 및 기도가 없이 그냥 "지루하고 괴로운 일"로, 즉 당연히 격는 증후군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결과가 나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것이다.

한참을 회개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사역을 그 같이 부정적이고 억지로 하는 마음으로 드린것이 마음이 아팠다. 교수라는 직분과 사역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것임으로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섬기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올려 드려야 한다. 한참의 회개를 통해 이제 마음을 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채점도 예배이다. 강의 들어가기전과 후에만 기도하는것이 아니라, 채점 전, 후, 중간에도 기도를 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예배의 자세로 주변을 깨끝하게 하고, 나의 복장도 강의때처럼/예배때 처럼 단정히 하여 임하자고...

결과는? 교수로 섬긴 이후 처음으로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채점을 해보았다. 아이들의 답을 하나 하나 읽으며 웃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며, 또 안타까워 하고... 입에서 찬양도 나왔고, 커피맛도 되돌아 왔고, 잠도 편히 잤다. 사무실이 무섭지도 않았다. 나는 이렇게 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 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겠다는 것은 내가 진 십자가의 무게로 스스로 질식하여 지쳐서 사는 삶일지 모르겠다. 내 삶을 채점하실 예수님을 뵈올때 까지 바른 걸음으로 매 순간을 예배로 그분께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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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23:20

교수의 진정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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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채점으로 바빴다. 내일 부터는 더 바쁘고 힘들것 같다. 채점거리가 책상위에 잔뜩 쌓여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주의 날 이라 채점을 멈추고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키려 애썼다. 채점해야 할 페이퍼들이 눈에 들어 올때마다 유혹이 생겼지만 오늘은 주님만 응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제까지 채점한것과 지난학기를 회고해 보며 오늘 크게 기뻐할일 하나를 발견했다. 학생들의 변화이다. 지식의 변화도 분명히 생겼다. 제법 어려웠던 개념들을 아주 잘 소화하여 정리한 내용들을 읽어가며 대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참으로 기쁘게 했던 것은 이들의 삶의 태도 변화에 대한 고백을 읽을때 였다. 아이들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지식의 자랑보다 마음의 변화를 적은 글의 내용을 찬찬이 읽으며 큰 기쁨을 느꼈다. 전에 갖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이다.

전에는 아이들이 개념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것을 현장에 잘 적용하느냐가 나를 기쁘게 했고, 그것으로 내 스스로의 강의 능력을 평가하곤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험을 채점하면서 쉬운 질문에도 빗나간 대답 및 모호한 대답을 읽으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채점하곤 했었다. 그리고 제법 까다로운 질문을 다소 정확하고 깊이 있는 대답을한 답안을 읽으며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같은것들 보다 사람의 변화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한다. 시험답안속에, 그리고 텀 페이퍼에 담긴 글 가운데 생각과 마음의 변화를 대하면 감사가 튀어 나온다. 수업을 빼먹고 불성실 하였던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며 부족하지만 끝까지 시험문제에 답을한것을 보며 나는 몹시 기뻤다.

교수인 나는 지식 전달자와 지식 창출자만이 아니다. 교수인 나는 나의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조명하고 그 안에 발견된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학생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아이들이 심령에 변화를 받아 삶이 변화해 가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리사의 변화, 불성실했던 앤드류의 성실성, 불평스런 말을 습관처럼 던지던 제니퍼가 감사의 표현으로 수업을 마치던것... 나는 이 맛으로 교수하고 있다. 이국땅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용하시는것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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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00:11

인디애나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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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글은 2005년 eKOSTA (http://www.ekosta.org/197)에 기고했던 글이며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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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대학 어느 코스탄 교수

우리들의 삶은이야기 표현되어질 있으며,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삶의 모습을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는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야기를 아주 하시는 분임을 있다. 예수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참으로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eKOSTA에서 내게 글을 부탁할때도 “…. 몇몇 코스탄들의 이야기들을 실어 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 복음에 빚진자로서이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정, 학교, 직장등에서 격게되는 고민과 갈등을 나누어 주시면…”이라고 하였다.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내게는 예수님 때문에 할이야기가 많이 있음으로 쾌히 털어놓아 보겠다라고 답하였다.

나의 이야기

본래 나는 운동선수 였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2학년때 부터 빙상을 시작하여 한국체육대학졸업할때까지 앉아 있는 시간 보다 뛰거나, 자전거 타거나, 얼음위에 서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다른 운동선수들과 같이 수업을 거르거나 오전수업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고등학교시절 학교에 나간 수는 한달이 채되지 않을정도로 운동만 하였다. 따라서 운동으로는 제법 유명해져서 나를 나로 정의 되어질 있는 것이운동선수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분위기는운동선수=무식한이 정의되어 지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무식하다는 말만 내게 사용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두들겨 패는 자존심에 문제가 있는 젊은 이였다. 자존심의 문제는 운동선수로서 “1 제일주의 남을 이겨야만 살아 남는 세계관을 형성 시켜 주었다. 그같은 정신으로 나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그덕분에 예비고사 (지금의 학력고사) 점수와 관계없이 빙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은 불편함 없이 들어갈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 1학년때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 따라 3학년때에는 남들과 같이 시험은 보아야 했고 에비고사에서 나는 120점의 점수를 받았다. 그점수는 당시 그냥 아무거나 찍으면 나올 있는 점수 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과목당 2-3 걸쳐 응답을 하여서 받은 점수 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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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나는 그렇게 소원하던 1980 동계올림픽을 나갈 없게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갑자기 교수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기초가 없었던 지라 나는 병원에 몇번 입원할 정도로무식하게공부하였다. 덕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로 들어갈 있었다. 대학원과정중 한번 입원했는데 고향인 원주 연세대학 병원에서 나의 병을 다룰 없다고 하여 서울대학병원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서울대 병원에서 한달을 누워 있으며 젊음을 누워지내기가 너무 한심해 우연히 당시 지하실에 있던 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고 건강을 달라고무식하게기도 했다. 은혜로 수개월개월 후인 1984년에 미국의 University of Oregon으로 유학오게 되었다. 아름다운 Eugene 도착하자 마자 주변에예수쟁이들이 벌떼 처럼 달려 들었다. 특히 Nevigator아이들이 많이 못살게 굴었지만, 모국에서 처럼 사람을 구타할 없어 많이 참았다. 덕분에 예수님을 많이 있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김치찌개를 아주 맛있게 끊여 대접하는 한국교회에 음식때문에 정기출석 하였다. 그당시 나는 교회 예배하러 간것은 결코 아니었고 한국식당쯤으로 생각 하였다. 제법 단골손님이 되자 교회에서는 나를 서리 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 보려고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즈음에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아내를 여름방학중 모국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집사라 믿음이 좋은줄 알고 결혼했던 아내는 결혼후 바로 내게 믿음이 없음을 알고 새벽기도를 하며 나를 위해 중보하였고, 나는 그런 아내를 심하게 핍박하였다 (핍박속에 구타는 없었음을 명시한다). 여하간 공부를 열심히 한덕분에 1990년초에 여가학 (Leisure Sciences)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국에서 직장을 빨리 잡아보려고 졸업도 하기전에 귀국하였다.

당시 여가학 박사가 드물었던 지라 쉽게 교수자리 잡을 있을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출신학교가 운동은 잘하지만 공부로 별로 유명세가 없는 지라 나는 여자전문대학교 야간 수업에서 교양과목 하나를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을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아기를 키우고 밥만하던 아내는 귀국전부터 연세대학에서 강의자리를 여러개 받아놓은지라 나는 아내를 외조할 밖에 없었다. 아침에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빠는 하나였고 엄마들의 눈총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낮추심이 그곳에서 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을 그당시에는 몰랐었다. 낮추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기도 응답이었다. 당시 아내는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같은 미국으로 다시 보내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The University of Georgia Post-doc하러 오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열성어린 중보와 섬김, 아내의 기도 등으로 어느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마음 활짝 열고 영접하게 되었다. 캠퍼스 산책중 갑자기 그동안 귀로 듣고 간간히 성경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성경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기쁨을 체험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했던지,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나를 대신 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울고 웃는 미친사람처럼 캠퍼스를 걷다가 결국은 창피하여 연구실에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기도를 한참드렸다. 학자로서 느낌보다는 사실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내용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참으로 분명한 사건으로 깨닫아 지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뒤 나의 세계관은 온전히 바뀌고 성경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다듬어가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성공을 무섭게 추구하던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기쁨을 서서히 체험해 가고 있었다.

그뒤 Florida International Univeristy Ohio University 에서 각각 3년씩 교수로 보냈다. 특히Ohio University에서는 이근상 목사님의 스파르타식 성경공부, 전도훈련, 새벽기도 등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처음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고 훈련 받았다. Ohio University에서 2년째 되던해 지금 재직하고 있는 Indiana University 교수채용 공고가 났었으나 새벽기도하던중 하나님께서 계속 남아있으라는 인도함 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자훈련을 계속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순종하였다. 인디애나대학은 사실 나의 분야로서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라는 소식을 학회에서 들었을때는 순종을 잠시 후회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위 내노라하는 좋은 학교는 기존의 같은 전공 교수가 은퇴하거나 그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지 않는한 다시 교수채용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한학기에 3-4과목 가르쳐야하는 Ohio 대학이 주님께서 나를 있으라 대학이기에 그곳이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믿으며 기쁘게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좋은대학의 교수라는 육신의 정욕을 믿음으로 포기한것이었다.

나는 계속 제자훈련 받으며 그곳 생활을 철저히 즐겼다. 성경공부와 새벽기도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었는지 모른다. 그러던중 3년이 채워지기도 전에 Indiana University에서 편지가 왔다. 지난해 오기로한 교수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지만 오기를 거부해서 다시 교수채용을 하니 응모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시 기도하며 인디애가 가는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까 여쭈는 가운데 평안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침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던 성경공부의 교제도 거의 끝나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원 하였고, 인터뷰하자는 제의를 한달뒤 받았으며, 그뒤 학교로 부터 공식적인 Offer 받았다. 그러나 제의를 그자리에서 수락하지 않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려고 1주일의 시간여유를 부탁했다. 뛸듯이 기뻤지만 나와 아내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려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6일째 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7일째 여호수와 1장의 말씀을 통해 떠나도 된다는 하나님의결제 받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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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이곳 인디애나대학에 와서 한인기독 학생회 (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Fellowship 혹은목요모임”) 지도교수를 하며 매주 목요일 학생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매주 30-40분의 설교를 맡고, 설교를 위해 매주 10-20시간을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한다. 강의 준비는 몇시간 안해도 지난 여러해 동안 했던 것이고 평소 책과 논문을 읽고 새로운 글을 쓰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말씀준비는 힘들다. 그러나 힘든 말씀준비는 교수로서, 미국에 사는이방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귀한 방편이 되었다. 오하이오 대학에서 tenure 받았지만 금년 이곳대학에서 다시 tenure 따낼 있었던 것도 말씀준비하고 설교하며 받은 하나님의 은혜덕분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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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나의 짦막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죄인이었던 때의 나의 모습이 있고, 구원 받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구원 이후에 어느 목자의 헌신어린 제자훈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죄인이었을때의 삶과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간단히 이야기를 하였지만 1984년 유학온 이후의 이야기는 20년간 이방에서의 삶에 대한 재빠른 요약이다. 나는 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eKOSTA에서 요청한 몇가지 주제를 다룸으로 나의 이야기를 좀더 정리해 보려 한다.

이방에서의
미국에서의 삶은 흘어진 나그네의 , 이방 삶인것 같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 있어서 우리와 친숙한 한국의 삶의 환경과는 참으로 다르다. 뿐만아니라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얼굴 색갈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소수민족에 속한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소수민족의 삶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의 미국은 소수민족이 현재의 다수인 백인과 비슷해질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과거와 오늘의 현실로 보면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고 있는 우리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유학생 시절 언어가 능숙치 못해 어려움 많던 시절에는 어른인데도 언어의 수준을 나이 수준하고 비슷하게 맞추어 대하려는 백인들을 대한적이 있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매끈한 삶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껄끄러운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낮설고 광야같은 이방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는 훈련장소 같다. 평소 의지하던 부모, 형제, 친척이 이곳에 없으며, 마음 편히 대할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광야 같이 황량한 곳이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비상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 학업이나 교수의 삶은 결코 안락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뒤에 서고 싶지 않고, 앞서자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는 없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뿐아니라 미국에서 학생으로나, 교수로서 다수인 백인을 섬기며 이끌어 나가려는 삶은 편안 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이곳 캠퍼스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신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은 신앙생활을유격훈련장으로 비유 하신적 있다. 나는 현재 매학기당 두과목씩 강의 한다. 그외 박사논문 지도 학생 상담, 여러 회의 분주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두과목 강의 준비보다 거의 두배의 시간이 들때가 많다). 때로는 지역교회 다른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수양회 강사 혹은 지역교회 목사님 출타시 가끔 말씀을 전하는 역할로, 그리고 내가 속한분야 학술지의 편집장으로, 미국교회의 장로로, 세아이의 아빠로,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아내의 동업자/동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적힌 모든 역할은 쉽게 수행할 있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조금도 감당할 없는 일이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님이 삶은 유격훈련장 으로 비유하셨을때 나는 크게아멘하였다.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방의 정의는 갑자기 바뀌게 된다. 하나님 믿지 않는 이들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된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을 감싸주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장이다. 믿는 자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이방백성들, 복음에 눈먼자들, 세상 성공과 물질의 욕심이라는 교도소에 같인자들, 상처로인해 억눌리고 삶을 절뚝거리며 사는자들은 복음으로 자유케 해야하는 귀한 사명을 가진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채 살던 운동선수의 삶으로 시작하여 미국에 유학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게됨으로 이제 선택된 백성으로, 복음에 빚진자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쥐뿔도 가진것이 없으면서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살아가냐?”라고 묻던 어머니는 2003 미국 방문중에 구원받고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1995 나의집을 방문 하였던 여동생 역시오빠와 언니는 무엇때문에 저렇게 기쁘게 살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귀국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금 지구촌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섬기고, 자신의 시어머니를 전도 하여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그외 여러 학생 방문 교수들을 도처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들이 여럿이 있다. 이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박사학위 마치고 교만의 어둠속에 살던 나를 하나님의 흩으심으로 조지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대학 교수라는 직업을 주셔서 아직 은혜에 이르지 못한자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여드림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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