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3.01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2. 2009.09.10 준석 형제의 코스타 09 간증문
  3. 2008.04.20 인디애나대학에서
2010.03.01 11:13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 부부가 아끼고 사랑하던 자매가 있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자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자매는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과 지체들을 섬기고 있었고, 그 섬기는 모습은 볼수록 아름답기도 하였지만 은혜가 충만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자매를 형제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자매는 교회에서 어느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져 갔다. 나또한 이 커플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제법 흐뭇해 하였고, 다른 지체들도 둘의 사귐을 기뻐하고 있었다. 선남 선녀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같아 보여서 흐뭇해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늦게 자매로 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과 별거중인 남편이 미국에 막 도착하였고, 자신을 찾고 있으며, 만나게 되면 자기에게 해를 가하게 될것이라는 이야기 이다. 전 남편이 대화중 자매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는 전화협박이 있었기에 자매와 남자 친구는 얼른 경찰에 신고도 하였고, 경황을 따질것 없이 형제는 자매를 보호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더우기 별거중인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포악하기도 하여 같이 살 수가 없었다고 하며 염려를 하고 있었다. 자매가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우선 자매를 보호 하는것이 급하다는 생각에 유학전 자매의 삶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 문제 수습에 골몰해 있었다.

기도하며 그 다음날 사태 수습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 시작 하였다. 하나님, 왠 날벼락 입니까? 어떻게 해야 이 날 벼락을 피할 수 있나요? 뭐 이렇게 다급한 기도를 했던것 같다. 아침이 되어 자매로 부터 또 전화 왔다. 어느 어느 호텔에 있으니 이 자매가 찾아 오던가, 아니면 자매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그 별거중인 남편이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세가지 뿐이었다. 호텔 이름, 폭악하다는 별거중 남편, 그리고 이들이 만나면 위험할 것이다 라는것. 다시금 기도하다가 평소에 없던 용기가 솟아 낫다. 이 방분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얼른 한국어로 된 사영리 두권을 찾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호텔을 내가 찾아 가겠다고 하였다. 자매의 남자 친구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내 안에 솟아나는 용기는 형제의 경고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형제는 내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 그 방에 들어가면 문을 닫지 말고 조금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 쿵쾅거리며 몸 싸움이 나면 자기가 곧 바로 뛰어 들어 상황을 제압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평소 나는 선한일을 위해 위험한 일에 뛰어들 용기와 배짱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내게 딸린 어린 아이가 둘 있었고, 또 사랑스런 아내가 있어서 그같은 위험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피해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을 택하는 그런류의 사람이다. 몸싸움이 나면 몸을 방어할 정도로 힘도 넉넉히 있다고 생각치도 않았고, 무엇보다 멀리서 부터 원한을 품고 달려온 사람의 힘을 당해낼 자신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용기를 낸것은 분명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나는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았던 것이다.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짱은 나의 선함으로 나올턱은 전혀 없고, 분명 하나님의 복음전파에대한 열심이 내 안에서 느껴진 것이다. 내 안에 솟구치는 사랑, 특히 아픔을 가지고 미국 까지 달려온 그 방문자에 대한 불쌍함이 내게 가득차 있는한 가만히 사태를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온 방문자의 호텔을 향해 운전해 갔고, 그의 방 번호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면서 방에 들어 서는 순간 방이 참으로 어둡다라고 느꼈다. 그 방문자는 문을 열어 주고는 침대가 둘 있는 방중 구석 침대로 얼른 걸어가서는 침대위에 곧곧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중간에 전화를 놓는 탁자위 불이 조금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 어색함을 깨려고 얼른 나의 소개하였더니, 이미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하며 아내를 잘 돌보아주어 고맙다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뒤 나는 바로 그 방문자에게 약 5분간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뒤에 사영리 하나를 그의 손에 들려 주고, 나는 다른 사영리를 들고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 그리고 페이지 마다 간단한 설명을 더해 주었다.순한양 같이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방문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세번째 영적원리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분을 다룰때 방문자의 얼굴이 이그러 졌다.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드디어 참기 어려워 이 막 폭팔하려나?”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다행히 아무런 저항도 없어서 네번째 원리까지 진행 시켜 나갔다. 나는 용기를 내어 네번째 원리를 직접 소리내어 읽으라고 부탁하였다. 그 방문자는 또박 또박 읽어 내려 갔다.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접하겠습니까?” 물었다. 1-3원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다. 1분 이었겠지만 내게는 제법 길게 느껴 졌다. 그러던 그가 한참만에 !”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인기척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얼른 정말요?”라고 하며 당황하며 영접기도를 인도하였다. " ...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 

얼굴에 가득한 그의 눈물을 보며 축하해 주었다. 눈가를 타고 흘러 내리는 그의 눈물은 설움과 섞여 있었는지 하염없이 솟아 내렸다. 내가 축하하는 의미로 시간은 좀 이르지만 점심을 사겠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며 분노로 인해 식사도 하지 못하고, 또 미국에 도착해서는 먹는둥 마는둥 하여 배가 몹시 고팠다고 하며 우리는 함께 중국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를 따라 오는 형제 ("방문자"라는 호칭에서 "형제"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의 얼굴을 장난스레 쳐다 보았다. 거짓말 같이 그의 딱딱하고 분노에찬 얼굴이 펴지고,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햇살이 너무 이쁘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평범한 도로변의 가로수 나무를 보더니 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함께 아점 (아침 + 점심)을 먹은뒤, 자매를 만나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양쪽으로 저의면서 만나지 않고 한국으로 바로 되돌아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탁이 몇개 있다고 하였다. 첫째로 자신을 공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자매와 사이에 세살짜리 딸 아이가 있는데, 다른 날은 몰라도 생일은 기억하여 꼭 선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주라는 말을 아이엄마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자기가 선물을 살 기회가 없었는데 자기가 현금을 조금 줄테니 나의 두 자녀에게 선물을 사주라는 이야기 였다. 첫번째와 두번째 부탁은 수락 하겠지만 세번째는 굳이 안해도 된다고 강하게 사양 하였다. 그러나 형제의 간구가 너무도 진지할뿐 아니라 형제를 자유롭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결국 돈을 받았다.  

나는 공항에서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곳에서 이렇게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에 감동해서 였다. 마침 차안에 틀어 놓았던 CD의 곡중에 송정미 사모의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라는 찬양이 흘러 나와 따라 부르며 이상한 방법으로 그 형제를 이곳에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우리의 생활의 주된 터전인 이곳 미국 캠퍼스로 보내진 많은 청년들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전에 만났던 그 형제에게만 그같은 구원을 위한 열심이 있는것 만은 아니다.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캠퍼스의 청년들 또한 하나님께 돌아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으시다. 상한 마음, 빈 마음, 지친 마음에 필요한것은 복음이다. 오늘날 캠퍼스에 가장 중요시 여겨져야할것은 학위가 아니고 복음이다. 이것이 뒤 바뀌는한 우리들의 캠퍼스는 계속 죽음의 행진을 하고말 것이다.  

사진출처: http://iamasonofgod.wordpress.com/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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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17:59

준석 형제의 코스타 09 간증문

준석 형제가 2009년 KOSTA USA (Chicago)에서 발표한 
담대하고도 진솔한 간증을 eKOSTA에서 녹취하여
2009년 9월 8일 포스팅한것을 이곳에 링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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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00:11

인디애나대학에서

아래의글은 2005년 eKOSTA (http://www.ekosta.org/197)에 기고했던 글이며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_____

인디애나대학 어느 코스탄 교수

우리들의 삶은이야기 표현되어질 있으며,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삶의 모습을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는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야기를 아주 하시는 분임을 있다. 예수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참으로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eKOSTA에서 내게 글을 부탁할때도 “…. 몇몇 코스탄들의 이야기들을 실어 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 복음에 빚진자로서이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정, 학교, 직장등에서 격게되는 고민과 갈등을 나누어 주시면…”이라고 하였다.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내게는 예수님 때문에 할이야기가 많이 있음으로 쾌히 털어놓아 보겠다라고 답하였다.

나의 이야기

본래 나는 운동선수 였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2학년때 부터 빙상을 시작하여 한국체육대학졸업할때까지 앉아 있는 시간 보다 뛰거나, 자전거 타거나, 얼음위에 서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다른 운동선수들과 같이 수업을 거르거나 오전수업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고등학교시절 학교에 나간 수는 한달이 채되지 않을정도로 운동만 하였다. 따라서 운동으로는 제법 유명해져서 나를 나로 정의 되어질 있는 것이운동선수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분위기는운동선수=무식한이 정의되어 지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무식하다는 말만 내게 사용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두들겨 패는 자존심에 문제가 있는 젊은 이였다. 자존심의 문제는 운동선수로서 “1 제일주의 남을 이겨야만 살아 남는 세계관을 형성 시켜 주었다. 그같은 정신으로 나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그덕분에 예비고사 (지금의 학력고사) 점수와 관계없이 빙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은 불편함 없이 들어갈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 1학년때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 따라 3학년때에는 남들과 같이 시험은 보아야 했고 에비고사에서 나는 120점의 점수를 받았다. 그점수는 당시 그냥 아무거나 찍으면 나올 있는 점수 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과목당 2-3 걸쳐 응답을 하여서 받은 점수 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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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나는 그렇게 소원하던 1980 동계올림픽을 나갈 없게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갑자기 교수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기초가 없었던 지라 나는 병원에 몇번 입원할 정도로무식하게공부하였다. 덕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로 들어갈 있었다. 대학원과정중 한번 입원했는데 고향인 원주 연세대학 병원에서 나의 병을 다룰 없다고 하여 서울대학병원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서울대 병원에서 한달을 누워 있으며 젊음을 누워지내기가 너무 한심해 우연히 당시 지하실에 있던 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고 건강을 달라고무식하게기도 했다. 은혜로 수개월개월 후인 1984년에 미국의 University of Oregon으로 유학오게 되었다. 아름다운 Eugene 도착하자 마자 주변에예수쟁이들이 벌떼 처럼 달려 들었다. 특히 Nevigator아이들이 많이 못살게 굴었지만, 모국에서 처럼 사람을 구타할 없어 많이 참았다. 덕분에 예수님을 많이 있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김치찌개를 아주 맛있게 끊여 대접하는 한국교회에 음식때문에 정기출석 하였다. 그당시 나는 교회 예배하러 간것은 결코 아니었고 한국식당쯤으로 생각 하였다. 제법 단골손님이 되자 교회에서는 나를 서리 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 보려고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즈음에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아내를 여름방학중 모국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집사라 믿음이 좋은줄 알고 결혼했던 아내는 결혼후 바로 내게 믿음이 없음을 알고 새벽기도를 하며 나를 위해 중보하였고, 나는 그런 아내를 심하게 핍박하였다 (핍박속에 구타는 없었음을 명시한다). 여하간 공부를 열심히 한덕분에 1990년초에 여가학 (Leisure Sciences)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국에서 직장을 빨리 잡아보려고 졸업도 하기전에 귀국하였다.

당시 여가학 박사가 드물었던 지라 쉽게 교수자리 잡을 있을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출신학교가 운동은 잘하지만 공부로 별로 유명세가 없는 지라 나는 여자전문대학교 야간 수업에서 교양과목 하나를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을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아기를 키우고 밥만하던 아내는 귀국전부터 연세대학에서 강의자리를 여러개 받아놓은지라 나는 아내를 외조할 밖에 없었다. 아침에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빠는 하나였고 엄마들의 눈총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낮추심이 그곳에서 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을 그당시에는 몰랐었다. 낮추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기도 응답이었다. 당시 아내는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같은 미국으로 다시 보내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The University of Georgia Post-doc하러 오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열성어린 중보와 섬김, 아내의 기도 등으로 어느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마음 활짝 열고 영접하게 되었다. 캠퍼스 산책중 갑자기 그동안 귀로 듣고 간간히 성경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성경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기쁨을 체험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했던지,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나를 대신 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울고 웃는 미친사람처럼 캠퍼스를 걷다가 결국은 창피하여 연구실에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기도를 한참드렸다. 학자로서 느낌보다는 사실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내용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참으로 분명한 사건으로 깨닫아 지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뒤 나의 세계관은 온전히 바뀌고 성경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다듬어가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성공을 무섭게 추구하던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기쁨을 서서히 체험해 가고 있었다.

그뒤 Florida International Univeristy Ohio University 에서 각각 3년씩 교수로 보냈다. 특히Ohio University에서는 이근상 목사님의 스파르타식 성경공부, 전도훈련, 새벽기도 등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처음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고 훈련 받았다. Ohio University에서 2년째 되던해 지금 재직하고 있는 Indiana University 교수채용 공고가 났었으나 새벽기도하던중 하나님께서 계속 남아있으라는 인도함 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자훈련을 계속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순종하였다. 인디애나대학은 사실 나의 분야로서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라는 소식을 학회에서 들었을때는 순종을 잠시 후회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위 내노라하는 좋은 학교는 기존의 같은 전공 교수가 은퇴하거나 그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지 않는한 다시 교수채용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한학기에 3-4과목 가르쳐야하는 Ohio 대학이 주님께서 나를 있으라 대학이기에 그곳이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믿으며 기쁘게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좋은대학의 교수라는 육신의 정욕을 믿음으로 포기한것이었다.

나는 계속 제자훈련 받으며 그곳 생활을 철저히 즐겼다. 성경공부와 새벽기도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었는지 모른다. 그러던중 3년이 채워지기도 전에 Indiana University에서 편지가 왔다. 지난해 오기로한 교수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지만 오기를 거부해서 다시 교수채용을 하니 응모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시 기도하며 인디애가 가는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까 여쭈는 가운데 평안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침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던 성경공부의 교제도 거의 끝나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원 하였고, 인터뷰하자는 제의를 한달뒤 받았으며, 그뒤 학교로 부터 공식적인 Offer 받았다. 그러나 제의를 그자리에서 수락하지 않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려고 1주일의 시간여유를 부탁했다. 뛸듯이 기뻤지만 나와 아내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려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6일째 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7일째 여호수와 1장의 말씀을 통해 떠나도 된다는 하나님의결제 받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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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이곳 인디애나대학에 와서 한인기독 학생회 (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Fellowship 혹은목요모임”) 지도교수를 하며 매주 목요일 학생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매주 30-40분의 설교를 맡고, 설교를 위해 매주 10-20시간을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한다. 강의 준비는 몇시간 안해도 지난 여러해 동안 했던 것이고 평소 책과 논문을 읽고 새로운 글을 쓰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말씀준비는 힘들다. 그러나 힘든 말씀준비는 교수로서, 미국에 사는이방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귀한 방편이 되었다. 오하이오 대학에서 tenure 받았지만 금년 이곳대학에서 다시 tenure 따낼 있었던 것도 말씀준비하고 설교하며 받은 하나님의 은혜덕분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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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나의 짦막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죄인이었던 때의 나의 모습이 있고, 구원 받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구원 이후에 어느 목자의 헌신어린 제자훈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죄인이었을때의 삶과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간단히 이야기를 하였지만 1984년 유학온 이후의 이야기는 20년간 이방에서의 삶에 대한 재빠른 요약이다. 나는 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eKOSTA에서 요청한 몇가지 주제를 다룸으로 나의 이야기를 좀더 정리해 보려 한다.

이방에서의
미국에서의 삶은 흘어진 나그네의 , 이방 삶인것 같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 있어서 우리와 친숙한 한국의 삶의 환경과는 참으로 다르다. 뿐만아니라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얼굴 색갈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소수민족에 속한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소수민족의 삶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의 미국은 소수민족이 현재의 다수인 백인과 비슷해질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과거와 오늘의 현실로 보면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고 있는 우리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유학생 시절 언어가 능숙치 못해 어려움 많던 시절에는 어른인데도 언어의 수준을 나이 수준하고 비슷하게 맞추어 대하려는 백인들을 대한적이 있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매끈한 삶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껄끄러운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낮설고 광야같은 이방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는 훈련장소 같다. 평소 의지하던 부모, 형제, 친척이 이곳에 없으며, 마음 편히 대할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광야 같이 황량한 곳이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비상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 학업이나 교수의 삶은 결코 안락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뒤에 서고 싶지 않고, 앞서자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는 없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뿐아니라 미국에서 학생으로나, 교수로서 다수인 백인을 섬기며 이끌어 나가려는 삶은 편안 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이곳 캠퍼스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신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은 신앙생활을유격훈련장으로 비유 하신적 있다. 나는 현재 매학기당 두과목씩 강의 한다. 그외 박사논문 지도 학생 상담, 여러 회의 분주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두과목 강의 준비보다 거의 두배의 시간이 들때가 많다). 때로는 지역교회 다른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수양회 강사 혹은 지역교회 목사님 출타시 가끔 말씀을 전하는 역할로, 그리고 내가 속한분야 학술지의 편집장으로, 미국교회의 장로로, 세아이의 아빠로,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아내의 동업자/동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적힌 모든 역할은 쉽게 수행할 있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조금도 감당할 없는 일이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님이 삶은 유격훈련장 으로 비유하셨을때 나는 크게아멘하였다.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방의 정의는 갑자기 바뀌게 된다. 하나님 믿지 않는 이들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된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을 감싸주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장이다. 믿는 자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이방백성들, 복음에 눈먼자들, 세상 성공과 물질의 욕심이라는 교도소에 같인자들, 상처로인해 억눌리고 삶을 절뚝거리며 사는자들은 복음으로 자유케 해야하는 귀한 사명을 가진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채 살던 운동선수의 삶으로 시작하여 미국에 유학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게됨으로 이제 선택된 백성으로, 복음에 빚진자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쥐뿔도 가진것이 없으면서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살아가냐?”라고 묻던 어머니는 2003 미국 방문중에 구원받고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1995 나의집을 방문 하였던 여동생 역시오빠와 언니는 무엇때문에 저렇게 기쁘게 살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귀국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금 지구촌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섬기고, 자신의 시어머니를 전도 하여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그외 여러 학생 방문 교수들을 도처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들이 여럿이 있다. 이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박사학위 마치고 교만의 어둠속에 살던 나를 하나님의 흩으심으로 조지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대학 교수라는 직업을 주셔서 아직 은혜에 이르지 못한자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여드림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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