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유학생'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0.04.29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
  2. 2010.03.01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3. 2010.02.15 교회안에서 이성교제 (어느 이멜에 대한 답신)
  4. 2009.11.10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5. 2009.09.14 2009년 가을 학기를 시작하며...
  6. 2009.09.10 준석 형제의 코스타 09 간증문
  7. 2009.08.03 빠안쓰!
  8. 2009.08.01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9. 2009.07.24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2)
  10. 2009.07.21 코스타 2009 섬김 (4)
2010.04.29 17:13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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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에는 48.9%의 무신론자 (atheists) 학생이 있고, 
49.6%가 어떤 종류의 종교기관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자료: Religion Watch, 2010, March-April, p. 5.

우리의 캠퍼스는 어떤가? 
과연 방과 도서관에서 편안히 숨어 있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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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1:13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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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 부부가 아끼고 사랑하던 자매가 있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자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자매는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과 지체들을 섬기고 있었고, 그 섬기는 모습은 볼수록 아름답기도 하였지만 은혜가 충만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자매를 형제들이 가만히 두겠는가? 자매는 교회에서 어느 청년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져 갔다. 나또한 이 커플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제법 흐뭇해 하였고, 다른 지체들도 둘의 사귐을 기뻐하고 있었다. 선남 선녀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같아 보여서 흐뭇해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늦게 자매로 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과 별거중인 남편이 미국에 막 도착하였고, 자신을 찾고 있으며, 만나게 되면 자기에게 해를 가하게 될것이라는 이야기 이다. 전 남편이 대화중 자매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는 전화협박이 있었기에 자매와 남자 친구는 얼른 경찰에 신고도 하였고, 경황을 따질것 없이 형제는 자매를 보호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더우기 별거중인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성격이 포악하기도 하여 같이 살 수가 없었다고 하며 염려를 하고 있었다. 자매가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도 내게는 충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우선 자매를 보호 하는것이 급하다는 생각에 유학전 자매의 삶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 문제 수습에 골몰해 있었다.

기도하며 그 다음날 사태 수습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 시작 하였다. 하나님, 왠 날벼락 입니까? 어떻게 해야 이 날 벼락을 피할 수 있나요? 뭐 이렇게 다급한 기도를 했던것 같다. 아침이 되어 자매로 부터 또 전화 왔다. 어느 어느 호텔에 있으니 이 자매가 찾아 오던가, 아니면 자매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그 별거중인 남편이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세가지 뿐이었다. 호텔 이름, 폭악하다는 별거중 남편, 그리고 이들이 만나면 위험할 것이다 라는것. 다시금 기도하다가 평소에 없던 용기가 솟아 낫다. 이 방분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얼른 한국어로 된 사영리 두권을 찾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호텔을 내가 찾아 가겠다고 하였다. 자매의 남자 친구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내 안에 솟아나는 용기는 형제의 경고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형제는 내게 부탁을 하나 하였다. 그 방에 들어가면 문을 닫지 말고 조금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 쿵쾅거리며 몸 싸움이 나면 자기가 곧 바로 뛰어 들어 상황을 제압 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평소 나는 선한일을 위해 위험한 일에 뛰어들 용기와 배짱이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내게 딸린 어린 아이가 둘 있었고, 또 사랑스런 아내가 있어서 그같은 위험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피해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을 택하는 그런류의 사람이다. 몸싸움이 나면 몸을 방어할 정도로 힘도 넉넉히 있다고 생각치도 않았고, 무엇보다 멀리서 부터 원한을 품고 달려온 사람의 힘을 당해낼 자신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용기를 낸것은 분명 성령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나는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았던 것이다.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짱은 나의 선함으로 나올턱은 전혀 없고, 분명 하나님의 복음전파에대한 열심이 내 안에서 느껴진 것이다. 내 안에 솟구치는 사랑, 특히 아픔을 가지고 미국 까지 달려온 그 방문자에 대한 불쌍함이 내게 가득차 있는한 가만히 사태를 불구경 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온 방문자의 호텔을 향해 운전해 갔고, 그의 방 번호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면서 방에 들어 서는 순간 방이 참으로 어둡다라고 느꼈다. 그 방문자는 문을 열어 주고는 침대가 둘 있는 방중 구석 침대로 얼른 걸어가서는 침대위에 곧곧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중간에 전화를 놓는 탁자위 불이 조금 어두운 빛을 내고 있었다. 어색함을 깨려고 얼른 나의 소개하였더니, 이미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하며 아내를 잘 돌보아주어 고맙다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뒤 나는 바로 그 방문자에게 약 5분간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뒤에 사영리 하나를 그의 손에 들려 주고, 나는 다른 사영리를 들고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 그리고 페이지 마다 간단한 설명을 더해 주었다.순한양 같이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방문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세번째 영적원리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분을 다룰때 방문자의 얼굴이 이그러 졌다.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드디어 참기 어려워 이 막 폭팔하려나?”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다행히 아무런 저항도 없어서 네번째 원리까지 진행 시켜 나갔다. 나는 용기를 내어 네번째 원리를 직접 소리내어 읽으라고 부탁하였다. 그 방문자는 또박 또박 읽어 내려 갔다.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영접하겠습니까?” 물었다. 1-3원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침묵이 있었다. 1분 이었겠지만 내게는 제법 길게 느껴 졌다. 그러던 그가 한참만에 !”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인기척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얼른 정말요?”라고 하며 당황하며 영접기도를 인도하였다. " ...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 

얼굴에 가득한 그의 눈물을 보며 축하해 주었다. 눈가를 타고 흘러 내리는 그의 눈물은 설움과 섞여 있었는지 하염없이 솟아 내렸다. 내가 축하하는 의미로 시간은 좀 이르지만 점심을 사겠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며 분노로 인해 식사도 하지 못하고, 또 미국에 도착해서는 먹는둥 마는둥 하여 배가 몹시 고팠다고 하며 우리는 함께 중국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를 따라 오는 형제 ("방문자"라는 호칭에서 "형제"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의 얼굴을 장난스레 쳐다 보았다. 거짓말 같이 그의 딱딱하고 분노에찬 얼굴이 펴지고,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햇살이 너무 이쁘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평범한 도로변의 가로수 나무를 보더니 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함께 아점 (아침 + 점심)을 먹은뒤, 자매를 만나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양쪽으로 저의면서 만나지 않고 한국으로 바로 되돌아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탁이 몇개 있다고 하였다. 첫째로 자신을 공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자매와 사이에 세살짜리 딸 아이가 있는데, 다른 날은 몰라도 생일은 기억하여 꼭 선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주라는 말을 아이엄마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자기가 선물을 살 기회가 없었는데 자기가 현금을 조금 줄테니 나의 두 자녀에게 선물을 사주라는 이야기 였다. 첫번째와 두번째 부탁은 수락 하겠지만 세번째는 굳이 안해도 된다고 강하게 사양 하였다. 그러나 형제의 간구가 너무도 진지할뿐 아니라 형제를 자유롭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결국 돈을 받았다.  

나는 공항에서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먼곳에서 이렇게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에 감동해서 였다. 마침 차안에 틀어 놓았던 CD의 곡중에 송정미 사모의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라는 찬양이 흘러 나와 따라 부르며 이상한 방법으로 그 형제를 이곳에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우리의 생활의 주된 터전인 이곳 미국 캠퍼스로 보내진 많은 청년들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전에 만났던 그 형제에게만 그같은 구원을 위한 열심이 있는것 만은 아니다.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캠퍼스의 청년들 또한 하나님께 돌아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있으시다. 상한 마음, 빈 마음, 지친 마음에 필요한것은 복음이다. 오늘날 캠퍼스에 가장 중요시 여겨져야할것은 학위가 아니고 복음이다. 이것이 뒤 바뀌는한 우리들의 캠퍼스는 계속 죽음의 행진을 하고말 것이다.  

사진출처: http://iamasonofgod.wordpress.com/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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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5 13:45

교회안에서 이성교제 (어느 이멜에 대한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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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익명의 자매로 부터 이멜을 받았다. 유학하며 남자 친구를 만나서 교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였던 것은 교제를 통해 두 사람이 주안에서 더 아름답게 성장해 간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 하고,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상상만 하여도 흐뭇한 일이였다. 더우기 관계를 통해 신앙과 학업에 성장이 있다니 참으로 기뻤다. 서로가 사랑함으로 결혼에 대해 확신도 생긴다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혼전 형제와 자매가 흔히 격게 되는 스킨쉽의 문제도 서로가 주안에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 감사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좋은 이성교재에 부모님의 반대가 있다고 하였다. 부모님은 근본적으로 교회에서의 이성교제를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였고, 관계를 정리해라고 하여 자매가 몹시 힘들어 하였다. 따라서 나는 이같은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내 생각을 듣고 싶다고 해서 이멜을 보낸것이다. 나는 이땅의 유학생 가운데 자매와 흡사한 질문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이성교제의 단계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나의 이멜 답신을 약간 수정하여 (불필요한 내용 삭제하였음) 이곳에 소개하려고 한다. 
자매님,

답장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이멜을 읽고 또 읽어 보니 두사람의 교제에 좋은 열매들이 보입니다. 신앙의 성숙, 격려, 중보... 주님께 찬양드릴 항목들 입니다. 

교회안에서의 이성교제가 비성경적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교회안에서의 이성교제를 성경적이라고 보고 있고, 비성경적이라는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저는 오히려 창세기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것을 좋지 못하게 여기셔서 여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돕는 베필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들이 교회에서 만나는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그같은 관계를 건강하게 갈 수 있도록 잘 가이드해 주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노는것도 교회에서 놀며 교회에서 가이드 해주어야 하구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이성교제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성도들의 놀이를 가르쳐 줍니다. 그 결과는 당연합니다. 빛에서 사귀고 놀지 못하고 음지에서 사귀고 놀게 되기에 타락하거나 신앙이 무너지는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교회에서 이성을 사귀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라는 질문 보다, 어떻게 사귀는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것 (창조후 "보기에 좋았더라"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지를 묻고 고민하고 분별하는것이 더 좋은 질문이라고 봅니다. 두 사람의 사귐이 서로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두 사람의 사귐이 교회내의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이런것들을 살펴보는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두사람 서로의 우상이 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방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관계를 아주 싫어 하십니다. 두사람만의 교제는 다른 지체들과의 공동체생활의 틈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자라감을 방해 합니다. 

부모님의 염려는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부모로서 학업중인데 "연애" 하고 있다면 염려가 얼른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인 나도 그랬구요. 그러나 신앙을 가진 어르신들을 위해 두 사람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부모님들이 염려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부모님 공경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두사람의 관계가 아주 보기 좋고 또 서로가 주안에서 성장해 가는 모습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염려 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결혼전의 스킨 쉽으로서 서로 자제를 하고 있지만 둘이서 분명한 선을 긋는것은 좋을것 같아요. 예를 들어 손잡는것, 안아주는것외에 키스, 애무 등을 금한다는 분명한 선 이지요. 금년에 결혼하는 나의 아들 상민과 미국아이 Katie는 처음부터 손잡고 어깨동무, 안아주는것은 넘지 않기로 주안에서 약속하고 사귀도록 서로 결정 하였습니다. 약혼을 한 지금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고, 어려울때는 중보기도를 부탁해 오곤 합니다. 손을 잡되, 형제의 손이 자매의 팔 이상 올라오지 않게 하고, 어깨동무를 하되 그 손이 은근히 가슴으로 오지 않도록 분명한 선을 그으십시오. 형제님이 들으면 왠 날벼락이냐고 하겠지만, 주안에서 성숙한 형제이니 잘 지켜 나갈 것입니다. :-) 그리고 자매님은 성숙하기에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복장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나셔야 합니다. 한 여름에 긴 코트 입고 나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기에 적합한 복장인지 물어 보고 입으시면 형제가 눈으로 시험받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고린도 전서 10:31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목적이 되어서 교제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셔야 합니다. 
 
긴 질문에 다소 짦에 대답하였지만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샬롬!
사진출처: 
http://lifeinthenhs.wordpress.com/2009/03/26/locking-the-stable-door-after-the-horse-has-bol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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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4:38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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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죄가 관영하는 이 세상에서 미끄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며, 거룩한 신앙인으로 책망할것 없는 삶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숨쉬기를 할때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어 밷을 수 있듯, 주의 말씀을 그렇게 자연스레 순종해 가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야무진 공상일까?

 위의 질문 뒤에는 나의 미끄러짐으로 인한 아픔이 숨어 있다. 내게 있어 미끄러 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크게 벗어났던 작게 벗어 났던지간에 내게 있어서는 미끄러짐이다. 특히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이 미끄러 넘어졌을땐 더욱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의 한심한 신앙생활로 인해 눈물을 그렁이며 아파하기도 한다. 더우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는 데서 미끄러졌을 경우 나는 더욱 좌절한다. “그렇게 살아 가면서 어떻게 캠퍼스 사역한다고 하고, 교회에서 설교 하고, 학생들 상담하지?” 라고 묻는것 같다. 아 내게 이같은 미끄러짐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미끄러짐에는 나의 부주의가 많다. 미끄러운곳을 걸어갈때는 긴장도 해야 하는데 그냥 방심하고 진행할때 미끄러진다. 내 발걸을음 잘 점검하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을 기도를 통해, 또 말씀을 통해 분별해 가면서 지혜롭게 가면 미끄러짐을 극소화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영적 부주의는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한다. 늘 익숙해진 대학 캠퍼스가 내 생활의 주요 무대인 나에게는 영적인 긴장감을 갖기 보다는 늘 가던곳이고 하던 것이니 방심하게 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늘 만나고 얼굴을 대하는 편안한 가족이기에 말에서나 행동에서 실수할때가 있다. 아내에게 무례한다던가, 아이들의 말을 온전히 귀담아 들으며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방심하고 있을때가 있다. 

일상생활의 부주의가 미끄러짐의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장애물은 나의 교만이다. 나의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함 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때 흔히 나타난다. 나의 경우 교만은 나 혼자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나타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길이 더 안전해 보이고 더 지혜로와 보이는 것이다. 그같은 교만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향해 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이같은 생각이 내게 들어온 순간 나는 이미 미끄러진것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교만은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중요시 하게 된다. 일단 그같은 상황에 놓이면 세상것이 주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도 되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내가 나를 위해 만들고 싶은 그런 세계 및 상황을 바라게 된다. 이쯤되면 또한 내 왕국을 만들어 보려는 동기로 먹고 마시며, 뛰고, 쉬고, 일하게 된다. 나는 이같은 상황을 미끄러져 내동냉이쳐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빼먹지 말아야할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미끄러짐은 나의 회개의 문제와 아주 깊숙히 맞물려 있다. 입으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냥 자동적으로 용서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신앙생활 초기 특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적이 있었다. 이같은 회개는 변화를 동반하지 않기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게 된다. 그러나 때론 입술의 고백을 떠나 마음의 고백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아픈 마음으로 주께 용서를 부르짖는다. 입술의 고백보다 좀더 발전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이같은 방법은 도덕적 회개에만 머물 수 있어 또 다시 미끄러지게 한다. 참다운 회개는 가던길에서 거꾸로 되 돌아서야 된다는 결단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돌아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던길을 돌어서긴 했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며 그 눈을 뒤로 돌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응시한채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또 미끄러짐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유학생들과 삶을 나누며 대화하다보면 미끄러짐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자주 듣는다. 코스타나 교회의 수련회등 여러 집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이제부터는 바른 신앙생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헌신하려 하였지만 삶에 현장에 되돌아 왔을때 바로 미끄러져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좌절해하며 힘을 잃는다. 신앙생활에서 미끄러진채 거기서 그냥 멈출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복음의 힘은 넘어 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부딛히고 깨지며 살아갈때 우리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삶이다.나의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분명히 아는 것 하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빠를 세워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넘어 지는 나를 믿기 보다 나를 늘 세워 주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의 세 아이들은 나의 거룩한 삶 혹은 거룩을 향한 삶을 보고도 살지만, 나같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사용하시고 세워 가시고 만져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변화해 간다.

과연 영적 미끄러짐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많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죄성으로 미끄러지고 깨어지는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과 싸우는 대처방법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새벽이슬과 같은 믿음의 청년들에게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는 반드시 나누고 싶다.

첫채로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유학생활의 목표가 학위취득에 있는것이 아니라 거룩함 추구를 그 우선순위로 놓아야 한다. 이제 구원을 받았기에 천국은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에 신앙의 선한 경주를 멈추고 땅에 주저 않아 쉬고 있어서는 안된다. 공부하며 순간 순간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 즉 코람데오의 삶을 살도록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과 늘 동행한 에녹처럼, 오늘날 유학생들은 성경에 한줄밖에 나오지 않은 평범한 신앙선배인 에녹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을 소망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학업의 우수성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나의 죄성을 심각히 자각하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자 하는 죄성이 있음을 의식해야한다.  이것을 온전히 자각하게 되지 않으면 죄의 속임에 쉽게 미끄러져 버린다. 그러나 그같은 죄성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냥 미끄러져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삶임을 순간순간, 삶의 모든 상황속에서 인정하는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발전 시킨다. 따라서 캠퍼스에서든, 캠퍼스 밖에서이든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깊숙히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를 젖은 눈으로 바라볼때 우리는 나의 죄악들과 세상에 관영하고 있는 죄악들에 대해 치를 떨며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만 멈추지 말고,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와 화목을 원하셨던, 그리고 그 화목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며 큰 사랑에 감격해야 한다. 미끄러져 넘어져 있을때 우리가 일어설 수 있는 것도 그 사랑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 소름끼치는 미움이 없이 일어 선다면 또 미끄러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두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매일 매일 말씀묵상을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미끄러짐 없는 똑 바른 걸음을 걷기 위해 우리는 순간 순간, 매일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글을 마치며 우리들처럼 미끄러짐의 아픔을 경험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 1-2)

사진출처: http://farm4.static.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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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4 13:49

2009년 가을 학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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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대학에서의 한해가 벌써 지나갔다. 이제 두번째 해로 접어 든다. 조그만 학교라 적응에 별다른 노력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크리스챤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깊숙히 깨닫는일,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과 학문을 통합시키는 과제는 나로 하여금 지난 한해를 아주 흥미롭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학교의 사명을 아멘으로 받아 들이며, 매번 수업 준비를 통해 신앙의 질문을 던지는 일은 결코 한가한 작업이 아니다. Postmodernism이 팽배한 이 시대에, 인본주의적 사고로를 성경을 통해 비판하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대안을 제안하려는 작업은 칼빈에서의 교수생활을 가장 흥분되게 한다. 그리고 이같은 고민을 하도록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학기 시작은 미국에서의 오랜 교수생활중 가장 힘들었다. 사랑하는 제자의 급작스런 천국으로의 떠남에 몹시 힙들었기 때문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개학을 준비없이 그냥 맞이한것 같다. 그래도 내게 힘을 주고 다시금 나를 부르신이의 사명을 깨닫게 한것은 매 학기초 행해지는 개강 예배 때문이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학교 체육관에 모여서 함께 예배 하는 것이다.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서로를 위한 축복의 시간이 없었다면 이번 학기는 일어서기도 힘들었을것 같다. 

이번 예배의 특징은 거룩한 예배에로의 나아감도 있었지만, 교수가 학생을 향해 오른 손을 들고 축복해주고, 학생이 또한 오른 손을 들고 교수들을 축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교 말씀은 참으로 좋았다. 특히 크리스쳔 학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나를 상기 시켜준 귀한 말씀이 나를 세워줄 수 있었다. 학교 교목인 Mary Hulst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설교를 정리하였다:
"We don't only think that academically excellent and distinctively Christian can go together. We think they must go together. We are academically excellent because we are distinctively Christian. Our faith animates our scholarship. Our study stimulates our piety. All of you, along with all of us, will be in a community where being academically excellent and distinctively Christian isn't just a motto, but a way of life. Welcome, and welcome back, to Calvin College."
우리는 학문적 우수성과 훌륭한 그리스도인 삶은 병행되어 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만 하지 않습니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만 하는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훌륭한 크리스쳔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문적으로 우수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학문에 활기를 더해 줍니다. 우리의 공부는 우리의 경건성을 촉진 합니다. 우리 모두와 더불어 학생 여러분들은 학문적으로 우수함과 훌륭한 크리스쳔의 삶이 하나의 좌우명에만 그치는 곳이 아닌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에 있게 될 것입니다. 환영 합니다. 칼빈대학에 온것을 환영합니다! 
맞다. 훌륭한 크리스쳔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위대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학문을 게을리 한다 라고 하는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날의 예배를 통해서 다시금 슬픈 마음, 낙담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느슨한 생각을 다시금 나의 부르신 사명에 꼭 묶어 버렸다. 이제는 힘차게 걸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주어진 일에 정진할 때이다. 학생들을 다시 사랑하고, 그들의 발을 씻으며 제자로 만들어 가야하는 사명감에 다시 불타 올라야할 때이다. 앞을 보고 다시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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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17:59

준석 형제의 코스타 09 간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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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석 형제가 2009년 KOSTA USA (Chicago)에서 발표한 
담대하고도 진솔한 간증을 eKOSTA에서 녹취하여
2009년 9월 8일 포스팅한것을 이곳에 링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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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3 13:57

빠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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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igan State University에 있는 지체 들이 다녀 갔다. 함께 집에서 아내가 준비한 별미 수제비 해 먹고, 어느 자매가 가져온 맛나는 간식을 먹으며 아주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신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안에서 진지 할 수 있었다. 한참 교제한뒤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하여 두장 찍었는데, 첫번째 것은 "스마일!"이라는 말과 함께 표현된 모습이고, 그 뒤에 것은 "빠안쓰!" 라는 말에대한 반응이다. 아래 입는 속옷을 일본식으로 표현 하면 "빤쓰"인데,이 말을 코스타에서 장이규 목사님께 배워서 사용해 보았다.  

 스마일!
빠안스!

미국에 산지 벌써 약 25년이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학생들의 얼굴은 석고 처럼 굳어 있다. 동료 교수들이 의아해 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얼굴 모습니다. 그들은 어느날 한인 학생 누구 누구를 지적하며, "왜 누구 누구는 내게 늘 화나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의아해 하였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그 형제는 그렇게 말하는 교수를 몹시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내게 늘 말해 왔기에 나는 동료 교수에게 한국인의 얼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아마도 공자가 살아 있었다면 그의 귀가 좀 가려웠을것 같다.

나는 밝은 웃음이 참으로 좋다. 사실 그 같은 웃음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울론 슬픈집에 가서 혼돈된 사람 처럼 밝게 웃는 것 빼 놓는다면 일상생활에서의 밝은 웃음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밝은 표현을 위해 웃는것도 좋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 표현 되는 웃음은 더욱 더 아름답다. 천국에서 만날 우리 지체들의 얼굴 모양은 어떨까? 아마도 밝고 자비한 웃음일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어떨까? 그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여 하나님 임재시 얼굴을 땅에 쳐 박아야 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성경에 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쳐다 보시는 얼굴은 웃음이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스바냐 3:17)!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 보시며 웃음이 가득하실리 만무 겠지만, 그 가운데서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 가는 모습을 보시면 웃음이 가득하리라 본다. 밝게 웃자. 믿는 이들의 밝았으면 좋겠다.구원 받은 우리는 밝은 웃음을 회복 해야 한다. 빠안스 라고 소리 치기 보다 할렐루야을 부르며 밝게 웃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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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21:25

당신의 전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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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만나면 흔히 받는 질문이 직업에 관한 것이다. 어떤일에 종사하냐는 질문에 나는 흔히 대학 교수라고 짦게 대답하곤 한다. 그러나 대학교수라는 대답과 함께 금방 되돌아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역시 주저치 않고 "치료 레크리에이션" 혹은 "레크리에이션 치료"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면서 나의 대답은 적어도 이랬다. 그리고 그같은 대답은 나의 삶의 상태를 정확히 반영 하고 있었다. 나를 나로 정의 지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전문 분야와 그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라는것으로 나를 철저히 국한 시켰던 것이다. 내가 예배자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하는 귀한 사명은 교회나 성경공부에서나 고백해야하는 그런 악세사리로 여긴것이다. 

누구든 이제 내게 전공을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 전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나의 대답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은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예배 입니다!" 예배라는 새로운 전공이 내 삶에 따라 붙으면서 사실상 요즘 전공에 못지 않게 예배를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삶의 실천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전공 과목을 파헤치고 연구할때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예배에 대한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학문에 임하게 된다. 글을 쓸때도 그렇고 강의실에서 강의 할때, 학생들과 상담할때에도, 교수회의 에서도, 학술지 논문심사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께 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표현하는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흠뿍 받는 일이다. 이같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고 가는 친밀한 사랑으로 인해 예배는 기쁨과 감동이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나의 죄와 이땅에 만연한 죄의 흔적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회개도 한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나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님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만큼 나를 더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해질 수록 내가 공부 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진다.

또 다른 나의 전공이 예배 인지라 나는 "레크리에이션 치료"와 관련된 제반 활동영역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로서 대충 강의 준비를 하고 들어 갈 수 없다. 예배가 전공인 나는 나의 다른 전공인 레크리에이션 치료에 관한 글을 쓸때 대충 끄적거려 낼 수 없고, 남의 생각을 이리 저리 조각지어 살짝 새롭게 하는 치졸한 글을 쓸 수도 없다. 학생들 상담 하고 만날때도, 전화 받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높아 지려고 강의 할 수도 없고, 내 이름 높이려고 글을 쓰려고 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인간 중심의 사로로 만들어진 지식체계안에서 죄의 흔적들을 들추어 내고 이를 하나님중심의 사고로 다시 비판하고 묵상하려 애쓰게 된다.

그래서인지 삶 자체가 너무 재미 있다. 교수생활에 신명이 난다는 말이다. 전문직의 삶이 예배임에 그곳에는 은혜가 넘친다. 은혜란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바, 공부를 하면서, 전공분야로 세상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찰과 지혜가 그때 그때 주어져 흥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것이 쉽지는 않다. 많은 싸움이 있다. 예배의 태도를 잃고, 예배의 대상이 세상 혹은 내가 될때도 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늘 동반하는 치열한 싸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삶의 전환을 매우 감사히 여긴다. 노파심에 한가지 더 설명해야할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예배라는 전공은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칭하는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예배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예배학이라는 전공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예배의 삶을 사는 우수한 예배자로 살고 싶고, 영원한 예배가 있을 천국에서의 삶을 이곳에서 연습하며 더 누리며 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가 학문 분야 보다 앞선 주 전공이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 하시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의 전공의 분야를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도구로 쓰라고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것이 예배의 뒤에 물러 서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 둘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되야 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나이듯), 다시 말해 통합되어져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이루어 내는 가장 근본이 바로 이원론의 삶 (삶과 예배, 전공과 예배)을 떠나, 신앙과 전공이 (또 신앙과 매일의 삶이) 일원화 되는 삶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학문과 삶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영위되어 지는것 이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공과 예배가, 삶과 예배가, 주일과 주중의 삶,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이중적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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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4 16:27

날마다 더 작아 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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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땐 더 크고 싶었다. 나보다 좀 더 크다고 뽐내는 이들의 머리를 주어 박고 싶어 서였다. 좀더 커지니, 그것 보다 더 크고 싶었던 것이 나보다 더 큰 이들이 있어서 였다. 

1984년 겨울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어릴때 처럼 몸이 더 크고 싶어 서가 아니 였다. 사회적으로 크고 싶었고, 영향력의 힘을 키우고 싶어서 였다. 그래서 학교 선정할때도 내게 능력의 키를 더해 줄, 영향력의 힘을 더해 줄 그런 학교를 찾았다. 지도 교수도 그렇게 힘있고 능력의 키가 큰 자를 선택하려고 했다. 

대학 교수가 되어 서도 마찬가지 였다. 처음에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로 가게 되었다. 별로 알려 지지 않은곳이였다. 하바드 대학이나 MIT, UCLA, 예일 등 좋은 브랜드 네임의 학교가 아니여서 어느 학교 교수냐고 누가 물으면 플로리다의 조그만 주립대학이라고 말을 했다. 어느 후배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 이름을 물어서 알려 주자 "선배님, 그것은 서울에 있는 국제대학* 같은 학교 아니예요?" 라는 질문에 내가 있는 대학이 모국의 서울대, 연세대, 및 고려대학 같이 유명세가 없어서 "서울에만 국제 대학이 있냐? 플로리다에도 있다!"고 대답하며 내심 시큰둥 했다 (* 나는 국제대학의 가치를 폄하하는것이 아니고, 나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고백을 하는것이다). Ohio University에서 교수할때도 모국의 선.후배들이 학교 이름 물을때 마다 꼭 토를 다는것이 있었다. Ohio Stat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Ohio University는 어디에???? 더 크고,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학교에 있다는 것으로 나의 교수 직분을 그냥 그렇게 가격을 싸게 정해 버린것이다.

이후 인디애나 대학에 왔다. 내깐에는 더 이상 올라갈곳이 없다고 여기던 그런 학교였다. 그러나 그 대학 역시 모국에서 잘 알려진 대학이 아닌지라 나의 어머니 조차도 별 입맛이 없는듯 아들이 일하는 대학에 대해 더 알려 하지 않았다. 공대출신의 어느 친구는 Purdue University는 들어 보았지만 Indiana University라는 대학은 있는지 조차 몰랐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나는 남들이 붙여 주는 브랜드 네임으로 나를 저울질 하려 했다. 어디 까지가야 만족이 있을까? 얼마 만큼 더 올라 가야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있을까?

이제 칼빈 대학에 왔다. Calvin Klein이라는 브랜드는 알아도 Calvin College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학교로 보인다. 길에서 지나가다가도 학교 건물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담한 학교이다. 우리어머니 표현을 잠시 빌려 표현해 보면 "학교도 작고 건물도 작아 보여서 손을 조금만 올리면 지붕을 만질 만한 조그만 학교"에 지금 와 있다.

그런데 달라 진게 있다. 전에는 더 크고, 더 잘 알려 지고, 더 영향력 있는 대학을 동경하여 "상향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같은 가치를 화장실에 flush시켜 버린지라 남의 반응에 관심이 없어 졌다. 하나님 부르신곳에 내가 서 있으면 그곳이 황량한 사막일지라도 그곳이 내게 제일 가치 있는 곳이다. 내가 더 올라 가려고 하기 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 보다 그리스도가 더 높아질 일이 무엇일까를 순간 순간 생각하며 바라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부르신이가 너무 크기에 그 분이 가라고 하는 그곳은 내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그런곳임을 안다. 그래서 그곳이 내게 가장 적합하고 귀한 곳임을 은혜로 알게 되었다.

전에는 속아서 나의 성취를 위해 목숨걸고 애썼다. 많은 노력을 통해 나를 크게 하려고 애썼고, 그럼에도 커 보이지 않아서 나보다 더 큰 대학의 이름을 나와 동일시 시킴으로 나의 성공을 표현해 보려 애쓰기도 했다. 내 분야에서도 나의 이름을 돋 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명칭들을 추구 했다. 유명 학술지의 편집장, 연구소의 디렉터... 그같은 것으로 영향역의 범위가 큼을 표현하고 또 성공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달콤하게 즐겼던 것이다. 

내가 작아 지면 작아 질 수록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커지고 위대해 지는 그 비밀을 이제는 기쁘게 여기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낮은 지위로 일생을 보내신 후에 거기서도 더 낮은 곳인 골고다로 가셨고, 너무나도 잔인한 곳에서 누워서 돌아가시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세워지신채 돌아 가셨다. 전에는 내 입에서 얕은 입술로 부르짖던것을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아멘하며 받아 들이는 진리가 있다. 다음의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 5-8).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곳, 비단 그곳이 남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런 곳이라도,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커지지 않으려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더 높아 지는 삶을 산다면 그것 역시 매일 작아 지는 삶일 것이다. 칼빈대학은 내가 몸 담고 있기에도 과분한 곳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이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그리고 그분만이 높아 지도록 오늘도 더 작아 지고 싶다. 나의 섬김의 목적은 내가 작아 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섬김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가 작아 질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데 있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내 눈과 마음이 죄로 인해 이그러진 세상의 왜곡된 진리로 더 이상 속지 아니하고 매일 매일 더 작아 짐으로 그리스도가 삶속에서 더 커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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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1 11:46

코스타 2009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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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도 코스타 조장 멘토로 섬길 수 있었다. 부족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었다. 8지역을 맡았는데 주로 미시간과 오하이오 지역의 조장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혹 도울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아침 큐티 시간, 매 식사 시간마다 행해 지는 조별 교제, 저녁 집회이후 조모임 등 이 잘 되어 지는지 보살피는 섬김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시 영혼의 돌봄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맡은 8지역은 모두 12지역중 가장 적은 수인 4개의 조로 구성 되었고 (아래 단체 사진 참조), 5명의 조장 및 부조장이 있는 지역이었다. 적은 숫자를 섬김이 내게는 너무 좋았다. 몸이 불편한 나로서 충분히 감당할 만해서 좋았고, 무었보다 각 조별 한 영혼 영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지난해에는 약 15개조를 맡아서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지 충분한 기도도 못하고, 영혼의 돌봄도 쫏기다 시피하여 마음이 무거웠었다.


코스타를 마치고 잠시 금년의 코스타에서 있었던 섬김 몇가지를 회고해 보려고 한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곳에 다 적을 수는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교수 한사람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몇가지만 소개해 보려고 한다. 

내가 섬긴 8지역의 4개 조에 한명의 참석자가 구원 받지 못했음을 둘째날 아침 파악할 수 있었다. 믿는 아내의 권유로 참석은 하였지만 손들고 깡총 깡총 뛰며 찬양하는 "광신도"들의 모습을 보며 불편한 마음이 얼굴에 너무 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첫 교제에서 진지함이 보여졌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혼임을 확신할 수도 있었다. 첫날의 만남은 나의 간증을 들려 주며 마음을 열어 보라고 권유 하였다. 그날 이후 몇번 마주치며 얼굴이 밝아 지는것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만져가심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번의 만남을 제안 했고, 어느 오후 금식으로 점심식사가 없는 그날 조용히 휴계실에서 만나 복음을 전했다. 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간략하게 설명했고, 왜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를 편안하게 설명했다. 이후 4영리를 가지고 1원리 부터 3원리 까지 갔다. 앞에서의 설명으로 인해 1-3원리를 성명하는데는 무려 몇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4번째 원리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나오는데, 영접하겠느냐고 초대하였더니 바로 응했다. 형제의 손을 잡고 영접 기도하고 축복해주며 해어 졌다. 

이외에도 조장들중 개인적인 어려움과 혼돈으로 어려워 하는 지제가 있어서 상담도 하고 식사 교제도 하였다. 내가 담당하는 지역만 섬기는것이 아니고 코스탄 전체중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섬김이 필요한 지체 및 조를 찾아가 섬기기도 하였다. 어느 지역에는 한 형제가 ex-girl friend와 만나기 위해 코스타 3일째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 어느 조장으로 부터 만나 달라는 부탁이 왔다. 코스타 집회 끝까지 남아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받고 갔으면 좋겠다며 그 형제를 꼭 만나달라는 조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만나 보니 다음날 아침 떠나려고 하는 형제는 혹시나 해서 돌아갈 비행기 표를 2장 사서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비행기 표와 집회 마치는 날 오후 비행기표 였다. 형제의 말에 의하면 기도한후 잠을 잤는데 꿈에서 누군가 "가라"고 하는것 같아서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 비행기 타고 되 돌아 가야만 된다는 지체와 그 조원들과 약 30분 교제 하였다. 교제중 하나님 음성을 분별하는 것에 관해 몇가지 원칙을 나누었다. 교제를 마치자 형제 왈: "교수님 말씀 들으니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들은것 같습니다. 코스타를 마치고 떠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래서 좋다. 나이가 많이 들면 복잡하고 고집도 세다. 청년기는 그래도 말랑 말랑하며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때이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씨름하고 함께 기도하고 싶어 진다. 위에 몇 케이스만 적었지만, 여러 지체들을 만나며 대화 하였다. 실의에 빠진이와 밤 늦게 벤취에 앉아서 함께 눈물흘리며 기도하고, 삶, 학업, 취업 및 데이트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새벽까지 대화를 나눈 미혼자 그룹과의 만남, 전에 수양회 인도 했을때 만났던 지체들과의 follow-up만남등은 참으로 귀했다. 그리고 교수의 신분을 가지고 코스타에 참석한 지체를 몇명 만났다. 그들과의 교제를 통해 캠퍼스를 향한 비젼도 나누고 섬김의 기쁨도 간증 할 수 있었다. 

코스타는 내게 있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이다. 그리고 청년들과의 교제의 시간이다. 나는 3-4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청년들을 만났다. 코스타는 다른 사역자들과의 만남의 시간이다. 청년들과도 나의 아픔을 드러 내고 교제 하지만, 다른 사역자들과 삶을 나누는 일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늘 그러하듯, 코스타에서 만나는 몇 평신도 사역자들이 있다. 서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들을 멀찌기서 보고만 있어도 많은 시간 교제한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그들의 모습과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발견하고 나를 바라 보는 귀한 시간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그렇게 사용하시고 만져가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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