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5 20:17

아내의 큰 행복

아내가 가장 행복해 할 때는 

근사한 선물 받았을 때도, 

좋은 곳에 휴가 갔을 때도 아니었다. 


거친 손 살며시 잡고 눈을 바라보며 

당신이 내 아내인 것이 내게 가장 감사한 것이라 고백할 때였다. 

내 손에 선물이 없었어도 장소가 근사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올린 트윗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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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5 19:15

어느 군인의 기도

오늘 우리 교회 데이브 목사님이 설교중 사용하신 어느 군인의 기도인데 내 마음에 꽃혔다. 이와 똑같은 언어로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기도는 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한 기도이지만 이곳에 남겨보려고 한다.


일을 이루기 위해 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 강을 했더니,
가치있는 일을 하라고 을 주셨습니다.


행복해 지고
싶어 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 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칭찬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내지 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하나도 주시지 았지만,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마음
진작표현 못한 기도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받는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위장된 축복임이 확실하다. 위장되었다라는 표현이 솔직히 불편하다. 우리들이 당시 깨닫지 못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의미 없는 고난은 고난중 고난이다. 그러나 고난의 목적과 고난의 유익을 아는 성도의 고난은 축복이다. 부활절날 주께서 주신 고난들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게 한다. 부활의 신앙으로 고난을 유익으로, 감사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니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이 군인과 같이 하게 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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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4 12:32

나는 성도이다

미국이라는 이방 나라에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30년전에 미국에 왔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이를 셋이나 주셨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나와 같이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아간다. 며느리도 보았다. 그 아이는 백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의 얼굴로 백인 학교에서만 교수를 약 23년 하였고, 또 은퇴할 때 까지 교수를 하게 될 것이다. 


백인이 다수인 문화권속에 동양인의 얼굴로 살아가며 느끼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매우 중요하다. 모국에 있을때는 굳이 인종 중심의 정체감이 불필요 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였고 비슷한 얼굴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 색깔에 유난히 예민한 이 미국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겨나는 폭력과 차별이 매우 심각하다. 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더 약아진 것 일 뿐, 얼굴색깔과 관련된 인간의 죄는 이곳 미국에 항상 팽배해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감은 세월이 갈수록 달라져 감을 느낀다. 전에는 유학생이는 정체감으로, 이후에는 대학교수라는 정체감이 가는 곳마다 붙어 다녔다. 그러나 교수라는 정체감은 일터와 공적장소에서만 사용될 뿐 가정과 교회에서는 달리 사용되어진다. 정체감에 따라 내가 나를 대하고 또 남이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짐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내게 가장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부담이 되는 정체감이 있다. 바로 성도이다. 은혜의 관점에서는 늘 감사하다. 내게 성도라는, 영어로 saint라는 정체감은 내가 내 업적이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붙여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라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라는 정체감은 나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 행동에 있어서 큰 부담감을 가져온다. 그 정체감으로 인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생각하는 방법과 내용도 아주 조심스럽다. 마음에 담아두는 잘못된 동기가 있으면 아주 괴로워 진다. 우리의 생각도 아시고, 우리의 행동도 보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깊숙한 동기를 아시는 그분께서 나를 성도라 부르시기에 정체감이 가져다주는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그래서 그 무게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늘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삽자가의 공로를 기억하지 않고, 나의 책임있는 행동과 생각, 마음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 간다면 나는 금방 번 아웃 (탈진)되고 만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 살아갔을 때 나를 먼저 찾으셨고, 나 대신 죄가 되심으로 돌아사시고 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내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음을 기억하면 힘이 난다. 그 은혜의 기억은 나의 생각, 행동과 마음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른 행위를 함으로 바른 태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성도라는 정체감이 너무 좋다. 특히 부활절을 앞두고 이 정체감이 나를 기쁨에 푹 잠기게 한다.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한다. 그러나 나를 성도가 되게 하시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게 험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큰 은혜가 나의 태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이해되어 지지 않는 역설적인 그 사랑이 너무도 크기에 내가 감동하게 되고, 아무런 대꾸함 없이 그 분의 큰 사랑아래 내 죄된 의지와 태도가 꺽여버리는 것이다. 나는 성도이다. 누가 무어래도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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